월급 빼고 안 오른 게 없어 ‘…플레이션’을 붙인 신조어가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더니 이번엔 프루트플레이션(과일+인플레이션) 차례다. 전체 물가를 끌어올릴 정도로 과일값 상승세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요즘 마트에서 사과 한 개에 5000원쯤 하는 장면은 새삼스럽지 않고 백화점에선 사과 한 알을 포장해 2만 원 가격표를 붙인 상품까지 등장했다. 서민들이 과일을 들었다 놨다 망설이는 게 아니라 그냥 외면하는 처지가 됐다.
체감만 그런 게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과일값은 1년 전보다 38% 넘게 급등해 32년 만에 최대 폭으로 뛰었다. 2월 물가 상승률(3.1%)의 12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사과, 귤은 70% 넘게 치솟아 가격이 널뛰기하는 코인이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국책연구원인 농촌경제연구원은 이달에도 딸기, 토마토, 대파, 호박 등 과일·채소값이 적게는 10%대에서 많게는 50% 이상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과일값이 이처럼 폭등하는 건 지난해 이상 기후로 흉작이 든 탓이다. 봄엔 이상 저온, 여름엔 폭염과 폭우, 가을에는 병충해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주요 과일의 생산량이 20∼30%씩 급감했다. 게다가 가격 상승세를 주도하는 사과, 배는 까다로운 검역으로 수입이 안 된다. 정부는 병해충 유입 등을 우려해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식물 위생·검역조치(SPS)에 따라 사과, 배, 복숭아 등 8개 작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이들 작물을 우리나라에 수출하려면 8단계로 이뤄진 수입위험분석 검역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아직 이걸 통과한 곳이 없다. 1992년 이후 미국 독일 뉴질랜드 등 11개국이 한국에 사과 수입 허용을 요청했지만, 진전 속도가 가장 빠른 일본도 8단계 중 5단계 관문에 멈춰 있다.
사과, 배의 생육 주기가 1년 단위인 점을 감안하면 올가을 햇과일이 나오기 전까지 가격 초강세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과, 배 가격이 뛰면 대체 과일로 수요가 옮겨가 과일값이 연쇄적으로 오르고 채소값 상승세까지 자극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는 곧장 외식·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치솟는 과일값을 잡지 않고는 물가 상승률 2%대 회귀가 힘들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이번에도 꺼내든 카드는 ‘세금으로 할인 지원’이다. 설 연휴를 앞두고 690억 원을 들여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에 나선 데 이어 다음 달까지 또 600억 원을 투입해 사과, 배 등을 할인해 주고 수입 과일의 관세를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일회성 재정 지원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반짝 세일이 365일 세일이 되면 시장 가격을 왜곡하고 물가 잡기에도 힘이 달릴 뿐이다.
금(金)사과, 금배 현상이 어쩌다 올해 발생한 일이라고 넘어간다면 오산이다. 농가 고령화로 문 닫는 과수원이 늘고 있는 데다 기후 변화까지 겹쳐 과일 재배 면적은 빠르게 줄고 있다. 사과 재배 면적이 매년 1% 감소해 2033년이면 서울 여의도의 10배에 달하는 재배지가 사라진다고 농촌경제연구원은 예측했다. 지구 온난화 여파로 2070년대엔 강원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 재배가 가능하다는 관측도 있다.
이제 국내 작황에만 사과, 배의 수급과 가격을 의존하기보다 일정 부분 시장 개방을 검토할 때가 됐다. 그래야 소비자 선택권이 넓어지고 탄력적인 물가 대응도 할 수 있다. 정부는 수입 가능성을 거듭 일축하고 있지만, 금값 과일이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은 만큼 중장기 수입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국내 생산 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과일 농가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대책도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농산물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기후 변화에 맞춰 품종을 개량하는 방안도 시급하다. 국민들이 사과, 배 하나 사먹는 걸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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