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직격탄을 맞은 대학 이공계 연구실이 마비되고 있다. 서울대와 포스텍 등의 연구원들이 실험은 제쳐두고 작은 연구과제라도 따내려고 이곳저곳에 제출할 지원서 쓰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연구비 절벽’으로 부족해진 인건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인력을 새로 충원하기는커녕 박사 후 연구원들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하고, 이런 현실에 좌절해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연구를 이어가겠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정부가 33년 만에 처음으로 올해 R&D 예산을 지난해 대비 4조6000억 원(14.8%) 삭감하자 정부 과제를 상대적으로 많이 수주했던 국립대와 주요 대학들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서울대는 정부에서 받는 R&D 예산이 지난해보다 약 20% 줄고 학생 연구원 인건비만 200억 원이 삭감될 것으로 예상한다. 전체 학생 연구원의 5분의 1인 1600명분의 인건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연구비 예산이 15% 줄어든 비수도권 모 국립대에선 “교수들이 사비로 메우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이공계 R&D 예산 삭감이 의대 2000명 증원 정책과 맞물리면서 ‘이공계 대탈출’의 가능성도 커졌다. 지금도 이른바 ‘SKY’ 대학의 이공계 학과를 자퇴하고 정년 없이 고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의대 등으로 진학하는 학생이 한 해 1000명이 넘는다. 서울대 이과 전체 정원(1775명)보다 많은 2000명을 의대에 몰아주면 가뜩이나 연구비 대량 삭감으로 사기가 떨어진 학생들이 연구실을 지키려 할지 걱정이다.
국가 성장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면 인재들을 최대한 이공계로 유도해야 함은 물론이다. 최근 중요한 과학기술 11대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이 처음으로 중국에 추월당한 것으로 평가됐다. 앞으로 10년간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미래차 로봇 등 주요 첨단 산업에 필요한 인력 규모가 적게 잡아도 32만 명이 넘는다.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력 가뭄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고급 인재를 유치하기는커녕 있는 인재들마저 밥줄까지 죄며 다른 길 찾으라고 등 떠미는 형국이 돼버렸으니 이런 자해극이 또 있을까 싶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