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음악 잡지 읽는 걸 즐겼다. 좋아하는 음악인들의 기사를 읽는 것도 좋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인터뷰도 즐거웠다. 그런 기사들에서 가끔씩 보게 되는 이름이 있었다. 이판근이란 낯선 이름이었다.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이판근에게 음악 이론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들 때문에 이판근이란 이름을 들으면 ‘이론’이란 낱말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김광민, 김수철, 박학기, 봄여름가을겨울, 빛과 소금, 윤희정, 이정식, 인순이, 임인건, 한충완 등 쟁쟁한 음악인이 이판근의 제자였다. 이 대단한 이름들이 이판근을 찾아와 음악 이론을 배웠다. 하지만 이판근이란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적은 없다. 그는 세속적 명성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음악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그가 하는 재즈는 비타협적이었고, 상업적인 결과에 매달리지 않았다.
나 역시 이판근이란 이름을 곧 잊었다. 음악을 발표하지 않은 재즈 이론가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기엔 당시 난 록과 메탈 음악에 한참 빠져 있는 상태였다. 어렸다는 말을 써도 될 것 같다. 나이를 더 먹고, 듣는 음악의 폭이 더 넓어지면서 이판근이란 이름을 더 깊게 볼 수 있게 됐다. 이판근이 주도해서 만든 음반들을 뒤늦게 듣게 된 이유도 있었다.
뒤늦게 들은 ‘코리안 재즈 퀸텟’의 ‘째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1978년)과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1985년) 등 두 장의 앨범은 충격이었다. 한국에도 당당히, 그리고 단단히 재즈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케 해준 명연이었다. 이판근은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을 지휘하고 곡들을 편곡했다.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과 재즈 1세대 연주인들이 주목받았지만, 이판근은 뒤에서 작업에만 매진했다.
2010년엔 후배 재즈 음악인들이 결성한 ‘이판근 프로젝트’의 앨범 ‘A Rhapsody In Cold Age’가 발표됐다. 평생 후학을 가르치고 재즈 이론을 정립해 왔지만 앞에 나서지 않는 성정 때문에 정작 이판근의 이름을 내건 결과물은 나오질 않아 있었다. 후배들이 그의 악보를 보고 새롭게 해석한 음반이었다. ‘A Farewell To Madness’ ‘소월 길’ ‘The Rhapsody Never Ends’ 같은 곡은 이판근이 ‘한국 재즈’를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곡들이었다.
얼마 전 만난 피아니스트 김광민은 이판근이 얼마나 대단한 음악인이었는지 강조했다. 자신이 공부했던 버클리음대 교재보다 이판근이 정리한 책을 보는 게 더 쉬웠다며 그 시절에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를 감탄했다. 비결은 딱히 없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교재를 공부하고 자신의 이론을 더했다. 그렇게 정립한 이론을 배운 제자만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음악인이 없었다면 한국 대중음악이 발전할 수 있었을까. ‘호칭의 과잉’ 시대지만 이판근에게 ‘선생’만큼 적절한 호칭은 없을 것 같다. 한국 재즈,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이판근 선생이 올해 3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