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개나리 열매 본 사람?[서광원의 자연과 삶]〈86〉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13일 23시 30분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영문학을 하는 대학생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원전을 읽으면 두 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사랑에 목숨을 건 멋진 귀족 청년으로 알고 있던 로미오가 바람둥이에 가까운 게 그 하나고, 연인 줄리엣이 그 당시 14세도 안 된 나이였다는 게 다른 하나다. 이런 줄리엣이 이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당찬 말을 한다. “장미는 장미 아닌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이라며 가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자는 거다.

줄리엣이 말한 장미는 어떻게 이런 향기를 낼까? 무려 275종이나 되는 냄새 분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향사들이 “조향은 장미 향으로 시작해 장미 향으로 끝난다”고 하고, 저 유명한 향수 ‘샤넬 넘버5’에도 이 향이 들어가는 이유다.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 장미로 아내 클라라 베스트호프에게 사랑을 호소했다는데, 그래서일까? 서양인들은 지금도 이 향기 가득한 장미꽃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 2018년 미국 남자들이 밸런타인데이 하루 동안 무려 2억 송이를 여성들에게 선물했다니 사랑이라는 꽃말 값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메신저에 이상한 게 있다. 꽃이란 모름지기 열매를 맺기 위해 피는 건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열매가 없다. 꽃이 있으면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열매는 어디 있을까?

지금 남쪽에서 봄을 몰고 오는 개나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원산지라 봄이 되면 어디서든 노란 개나리꽃을 볼 수 있지만 이 열매 또한 볼 수 없다. “장미 열매와 개나리 열매를 본 사람?”이라는 질문에 흔쾌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진짜 본 사람이 없네요?”라며 그제야 의아해하기 시작한다. 원래 없는 걸까? 매개동물을 부르는 향기가 있고 암술과 수술이 있는 걸 보면 그럴 리 없다.

장미는 워낙 향기롭고 아름다운 까닭에 옛날부터 수많은 품종 개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꽃만 남고 열매 맺는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보기 좋은 꽃을 원하는 세상의 선호가 열매를 없애 버린 것이다. 개나리는 좀 다르다. 주로 꺾꽂이 형태로 번식하고 심다 보니 굳이 씨앗을 만들 필요가 없어 암술이 아주 작아져 버렸고, 그 탓에 제 기능을 못 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개나리꽃은 거의 수꽃이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 더 귀한 열매가 9월쯤 열리긴 하는데 그야말로 ‘어쩌다’이니 보기 힘들 수밖에 없다.

사랑을 많이 받은 덕분에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번성을 누리지만 그렇기에 본연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역설이랄까. 이들은 이제 사람의 손길이 없으면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워도 다음 삶을 열어갈 결실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게 생명의 법칙이어서다. 어디서나 스스로가 아닌 의존으로 이룬 건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장미#개나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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