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실시되는 22대 총선의 유권자들은 투표소에서 어지간한 성인 남성 키의 절반 정도 되는 긴 초록색 용지를 1장씩 받게 될 것 같다. 노란색 용지는 지역구, 초록색은 비례대표용 투표용지인데 비례대표 선거에 후보를 내는 정당이 크게 늘기 때문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 기표했다가는 자칫 엉뚱한 정당에 표를 주거나 무효표를 양산할 가능성이 커졌다.
▷15일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됐거나 창당을 준비 중인 정당은 71개다. 위성정당을 만든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을 뺀 나머지 69개 정당이 모두 비례대표 후보를 낸다면 투표용지 길이는 88.9cm가 된다. 야구 배트 평균 길이 83.82cm보다도 길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21대 총선부터 정당 득표율에 비해 지역구 의석을 적게 얻은 정당이 비례대표 의석 배분에서 유리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서다. 비례대표 할당 하한선인 ‘정당 득표율 3%’만 넘기면 예전보다 많은 의석을 가져갈 수 있다는 기대에 너나없이 욕심을 내보는 상황이 됐다.
▷유권자들로서는 비례대표 투표가 더 복잡해지게 됐다. 좁은 기표소 안에서 긴 투표용지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지지 정당의 이름을 찾아야 하는데, 눈이 어둡거나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실수하기 쉬운 환경이다. 이는 무효표 증가로 이어진다. 실제로 21대 총선 비례대표 선거에서 무효표는 122만여 표로 20대 총선 66만여 표의 2배 가까이로 늘었다. 비례대표 후보를 낸 정당 수가 14개 증가했고, 투표용지 길이도 15cm가량 길어진 것이 주된 요인으로 분석됐다.
▷그렇다고 이런 불편을 감수할 만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순기능을 하는지도 의문이다. 21대 총선에서 35개 정당 중 비례대표 당선자를 낸 정당은 5개에 불과했고, 비례 의석 대부분을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이 차지했다.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늘린다는 이 제도의 본래 취지가 무색해졌다. 14개 정당은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지지율을 얻었다. 이름을 처음 듣는 정당이 대부분인 이번 총선 역시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소지가 크다. 긴 투표용지를 만드느라 종이만 낭비하고, 174억 원을 들여 도입한 신형 분류기와 심사계수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허무한 결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런 문제점들은 4년 전에 이미 다 드러났고, 여야 모두 개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민주당은 한동안 이런저런 방안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현상 유지’를 택했고, 이를 비판하던 국민의힘은 되레 민주당보다 먼저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총선이 끝나면 ‘떴다방 선거’가 돼버린 비례대표 선거를 비판하는 여론이 다시 한번 분출할 것이다. 이번에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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