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인 ‘블랑카’,지금은 어떨까[함께 여는 문/정철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19일 23시 24분


2년 전 캄보디아에서 온 30세 여성 이주노동자 속행 씨는 영하 18도의 한파가 몰아치던 12월 20일의 새벽,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을 자다 숨졌다. 속행 씨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그 후 2년간 이주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들에 대한 인식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정철규 개그맨(스리랑카인 ‘블랑카’ 연기)·다문화 전문강사
정철규 개그맨(스리랑카인 ‘블랑카’ 연기)·다문화 전문강사
2001년 경남 창원시에 있는 공장에서 군 대체복무로 3년간 일한 적이 있다. 처음 회사에 시험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한 말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우리 회사에는 외국인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게 되면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겁니다.”

당시는 외국인을 지금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외국인과 함께 일한다니 내가 무슨 성공한 샐러리맨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고 출세해서 외국계 회사에 취직한 것 같았다. 외국 사람들의 문화도 배워 보고 같이 퇴근하면서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리라. 그러나 그런 상상은 첫 출근 후 산산이 부서졌다.

처음 본 외국인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은 처참했다. 컨테이너에서 지내며 밤낮없이 힘들게 일했다. 한국인 관리자들은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하고 욕하며 심지어 폭력을 행사했다. 당시 회사 직원 400명 중 제일 어렸던 나는 보다 못해 관리자들에게 건의했다. “욕하지 마세요.” “외국인 근로자들도 이름을 불러주세요.” 돌아오는 답은 “너나 잘해”였다.

제대하면 개그맨 시험에 응시할 생각이었던 나는 그때 다짐했다. ‘개그맨이 되어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때가 오면 꼭 이 회사 안에서의 차별을 소재로 이야기할 테다.’

그리고 2004년 개그맨이 돼서 스리랑카인 외국인 노동자 ‘블랑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를 외친 나의 연기는 뉴스에 날 정도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나는 그해 KBS 신인상을 탔고, 주한 스리랑카대사관으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다. 지난달 동아일보의 ‘한국블로그’라는 칼럼에서 ‘블랑카’를 언급하며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을 반갑게 읽었다. 나는 그 블랑카와의 인연으로 다문화 전문강사가 되어 현재 개그맨 겸 강사, 일명 ‘개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시도한 이후로도 한국 코미디에서 많은 외국인 캐릭터가 나왔다. 그러나 다문화 인구가 늘면서 종종 이런 코미디가 ‘비하’ 논란을 부르기도 한다. 최근 부활한 개그콘서트에서도 동남아 결혼이주여성을 모티브로 한 ‘니퉁’이라는 캐릭터가 이주여성을 비하했다며 비판을 받았다. 후배는 절대 비하할 의도가 없었겠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은 이런 이슈에 대한 민감도가 상당히 높아졌을 정도로 다문화 인구가 크게 늘었다. 다문화 인구는 현재 250만 명에 육박한다.

앞으로 이 인구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럴수록 어느 나라 출신이니, 어디 민족이니 하는 구분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사실 그런 게 다 무슨 의미일까.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명언이 떠오른다. ‘인종은 없다. 인종주의만 있을 뿐.’
#스리랑카#블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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