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이 다가올수록 정치가 도(道)보다는 기(技)의 영역으로 옮겨간 것을 절감한다. 그래서 얼굴 두껍든(厚), 뱃속 시커멓든(黑) 둘 중 하나는 해야 정치에서 성취한다는 100년 전 중국인의 역사 연구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후흑(厚黑)이 승부를 가르는 정치는 고대 중국에선 몰라도 21세기 한국 정치에선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정치 IQ가 후흑과 만날 때 지지를 더 보내는 게 현실이다.
서울 강북을 공천 소동 후 민주당 전체에 흐르는 침묵을 보자. 이재명 대표의 전횡을 비판하던 원로들도, 비명횡사당한 친문들도 약속한 듯 입을 닫았다. 친문 배제 때 비판 성명서까지 냈던 김부겸 전 총리는 “이제 더는 말 않겠다”고 돌아섰다. 정적에게 먹잇감을 주지 않겠다는 본능에 가깝다. 집단적 IQ가 작동한 것이고, 후흑에 비유하자면 후(厚)의 발현이다.
민주당이 한미 동맹론자인 위성락 전 북핵 6자회담 대표와 반미를 내세운 통진당의 후예 3명을 동시에 비례대표로 공천한 것은 명백한 가치 충돌이다. 그럼에도 워싱턴에서 말이 먹히는 위 전 대표에게 2번을 부여한 것은 신의 한 수다. 싱하이밍 중국대사 앞 해프닝, 반미운동가 대거 공천, 중국-대만 셰셰(謝謝) 발언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 대표가 미국 주도 국제질서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그조차 동맹파 외교관을 중용했다. 정치 IQ를 인정하든 흑(黑)의 작용으로 보든, 그건 유권자 몫이다. 대장동 쌍방울 등 숱한 사건에서 드러난 후흑의 징후와는 다른 정치 감각이다.
친윤 핵심 이철규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은 어떤가. “한동훈 사천(私薦)”이란 비판은 김부겸의 침묵과 비교된다. 비례 후순위를 받고 사퇴한 주기환 후보를 용산 대통령실은 사흘 만에 대통령 특보로 임명했다. 둘 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여권 핵심부가 당의 간판인 한동훈 위원장을 겨냥한 일인데,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검찰 수사관 출신인 주 특보는 인수위, 광주시장 후보, 총선 비례 후보, 대통령 특보까지 2년 사이 4번의 공직 기회를 부여받았다. “또 검찰, 또 아는 사람”이란 야당 비판에 앞서 대통령 지지자들이 뒷목을 잡을 지경이다. 비상근 무보수라지만 특보 인선을 총선 뒤로 늦추지 않은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 때처럼 섬세한 과정 관리가 안 됐다는 의미다. 후도 흑도 안 느껴지는 결정이 용산에서 나올 때가 있다.
요즘 조국 전 장관에게선 강한 후의 기운이 있다. 그는 유재수 금융위 국장의 비리를 눈감아준 혐의로 2심까지 유죄 판단을 받았다. 청와대 핵심의 청탁을 받고 공직 감찰을 무마시킨 건 권력형 범죄다. 그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입시 문제는 있을지언정 권력형 비리는 없다”고 답한다. 하도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유재수 건도 무죄로 바뀌었나’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어쩌랴. 조국혁신당에 표가 몰리는 건 이유가 있다. 대통령 주변과 검사들은 왜 느슨하게 수사받느냐는 질문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와 별개로 조국 본인과 황운하 의원처럼 하급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후보는 후보직에서 사퇴하기를 권한다. 그게 염치에 맞고, 그럴 때라야 조국은 후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높은 정치 IQ와 후흑의 만남이 좋은 정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 없이 선거 승리는 쉽지 않다. 2세기 전 프랑스 학자는 “모든 국가는 국민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했다. 요즘 유권자들의 정치 IQ는 정치인 못지않다. 여든 야든 높아진 유권자 수준에 걸맞게 정치 IQ를 더 높여야 한다. 이걸 못하고선 승리도 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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