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클래스 타는 빵’ 푸알란[정기범의 본 아페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7일 23시 33분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파리에 새봄이 찾아들었다. 거리에 만개한 개나리와 파릇한 새싹, 그리고 가벼워진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봄기운 가득한 파리를 느끼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내가 사랑하는 산책 코스는 파리의 좁다란 골목길이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 명소가 아닌 뒷골목에선, 고풍스러운 건물과 팔짱을 낀 채 걷는 귀여운 노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파리지엔들이 사랑하는 생제르맹 거리 주변을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여기 갈 때마다 즐겨 찾는 빵집이 있다. 1930년대 초 노르망디에서 빵집을 운영하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피에르 레옹 푸알란의 이름을 딴 빵집, ‘푸알란’이 그곳이다. 전통 방식으로 맷돌을 갈아 얻은 밀가루와 천연 효모를 사용한 동그랗고 단단한 빵 ‘미슈 푸알란(Miche Poilâne)’은 보관이 쉽고 맛도 뛰어나서 파리의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되기도 하고 일반 가정에서도 큰 인기다. 파리∼뉴욕을 2시간 반 만에 주파했던 초음속 여객기, 콩코르드가 운행되던 시기에는 뉴욕 최고급 호텔에 새벽 첫 비행기로 푸알란 빵이 배송되었고, 그 덕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배달되는 세계에서 가장 대접받는 빵’이란 별명도 얻었다.

창업자 피에르 레옹 푸알란의 3형제 중 막내였던 리오넬 푸알란은 형 막스 푸알란과 함께 14세부터 아버지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러나 두 형제의 재산권 다툼은 결국 푸알란을 둘로 갈라놓았고 오랜 상표권 논쟁 끝에 리오넬이 아버지의 파리 빵집을 물려받았다. 리오넬은 파리 근교, 비에브르와 런던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갖춰 나갔고 1993년에 국가 공로 훈장 기사 작위를 받는 등 날로 번창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조종사의 꿈을 버리지 못한 리오넬은 2002년 10월 31일 헬리콥터를 몰다가 집에서 멀지 않은 브르타뉴의 캉칼 해변에 추락해 불행히 생을 마감했다. 사고 이후 당시 18세였던 장녀, 아폴로니아가 푸알란의 경영을 맡고 있다.

리오넬 푸알란 부부는 빵 만드는 것 이외에 예술 작품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은 팔레 루아얄에 ‘이브 갤러리’라는 작은 화랑도 운영했다. 이 갤러리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이배, 남춘모 작가 등의 프랑스 진출을 도왔다고 한다. 리오넬 푸알란 부부와 저녁 식사 약속을 했던 이 작가들은 헬기 추락 사고가 난 줄도 모르고 식당에서 기다리다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고 사망 소식을 확인한 뒤 비통에 잠겼다는데, 이 이야기를 작가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보통의 파리 사람들은 푸알란의 상징과도 같은 ‘P’ 자가 새겨진 1.9kg짜리 동그란 빵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선다. 얇게 썰어 식사 때마다 가족들이 함께 먹는다. 나의 최애 메뉴는 장작으로 구워낸 사브레와 사과파이(Tarte aux pommes)다. 신선한 노르망디의 사과를 얇게 썰어 켜켜이 올린 사과파이를 한입 베어 물면, 향긋하고 달콤한 사과 향과 봄기운이 입안 가득 퍼진다. 집에 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가게 문을 나서자마자 한입 베어 물면 금세 배 속으로 사라져서 언제나 여러 개를 사야 하는 것이 유일한 흠이다.

#비즈니스 클래스 타는 빵#푸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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