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공상과학(SF) 드라마 ‘삼체’에는 태양이 3개인 문명이 나온다. 예측할 수 없는 공전 주기 때문에 기후가 온화한 항세(恒世)와 지옥 같은 난세(亂世)가 불규칙하게 반복된다. 난세엔 3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서 대지가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태양과 너무 멀어져 바다가 얼어붙기도 한다. 혹독한 난세를 버틸 방법은 단 하나, 항세에 대비해두는 것이다.
감염병 대유행(팬데믹)은 난세와 닮았다. 언제 올지 모른다.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시작되고 나서 대비하면 늦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 반드시 다시 온다.
전 세계를 휩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종식된 지 곧 1년이 된다. 지금은 황금 같은 항세다. 다음 팬데믹은 더 가혹할 수도 있다. 병원체가 노인뿐 아니라 영유아를 집중 공격하거나, 호흡기를 넘어 두뇌까지 침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살피며 다음 팬데믹을 착실히 대비하고 있을까.
백신 대응부터 보자. 정부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위기 종식을 선언하며 “신종 감염병 발생 이후 100일 이내에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mRNA 백신은 개발이 빠르고 사망 예방 효과가 큰 ‘게임 체인저’였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개발할 역량이 없고 선구매 경쟁에서도 진 탓에 대통령이 제약사에 전화해 ‘백신을 달라’고 읍소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와 국회의 대응은 거꾸로 가고 있다. 지난 2년간 327억 원을 들여 활동한 국가 mRNA 백신개발사업단은 올 6월 활동을 종료한다. 2단계 사업 예산이 전부 삭감됐기 때문이다. 예산 심사 과정에서 ‘코로나19가 끝난 마당에 굳이 지원해야 하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뚝심 있게 1조 원을 투자한 끝에 지난해 자체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다음 팬데믹 땐 어쩔 건가. 일본에 구걸할 건가.
다음으로 중요한 건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방역 조치의 근거 법령을 정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팬데믹 때 자영업자와 학생의 권리를 희생시켜 사회를 지켰다. 당사자는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보상도 미비했다. 신종 감염병이 와도 백신 도입 전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는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비용 효과가 큰 방역 조치부터 해야 하는데, 지금은 영업시간 제한과 등교 중단 등이 실제로 확진자를 얼마나 줄였는지 분석이 전무하다.
마지막은 병상이다. 지난 팬데믹 때 ‘병상 여유’와 ‘의료 여력’은 동의어였다. 정부는 다음 감염병에 대비해 비상시 동원할 수 있는 음압 병상 1700개를 2022년 말까지 설치하기로 했지만 이 계획은 올해 말로 2년 늦춰졌다. 중환자 치료 역량을 갖춘 양질의 병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조금 늦어지는 건 괜찮다. 하지만 중증·응급환자보다 경증·미용환자 치료가 더 돈이 되는 현행 의료비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비상 병상’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재 의료계와 정부가 의대 정원을 두고 벌이는 힘겨루기는 사치에 가깝다.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난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다음 난세에 대비할 지금 이 평화의 시기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바이러스는 지구 어디선가 다음 팬데믹을 노리며 숨죽이고 있을 텐데, 우리는 너무 쉽고 빠르게 과거의 교훈을 잊은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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