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장이 직접 재판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요?”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해 12월 국회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후배 판사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한다. 판사들이 머리를 짜내 제안한 재판 지연의 다양한 해결 방안엔 없던 것이었다. 사안이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드는 악성 장기 미제 사건을 법원장이 직접 재판하는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요란한 구호보다 가능한 처방 먼저
처음엔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전국 37곳의 법원장은 소속 법관과 직원을 관리하는 사법 행정의 책임자에 가깝다. 재판을 하지 말라는 명시적 규정은 없지만 관행상 하지 않았다. 법원장 외엔 사법 행정 경험이 거의 없었던 조 대법원장의 무모한 시도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중순 법원장 재판이 하나씩 열리면서 법관과 민원인들이 대체로 호평하고 있다고 한다.
단순하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메기 효과처럼 판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소속 법관이 갖고 있던 미제 사건을 법원장에게 재배당하는데, 그 자체가 해당 법관에겐 무능의 낙인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법관은 미제 사건을 털어내려고 더 애쓸 수밖에 없고, 이를 민원인이 싫어할 리가 없다. 둘째, 재판 능력이 법원장의 필수 조건이 됐다. 법원장 추천제로 인기투표에 영합해 법원장이 되려는 법관이 적지 않았는데, 그런 판사가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조 대법원장의 전임 대법원장이 사법부에 남긴 가장 큰 짐이 재판 지연이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전임자를 악마화하고, 내부의 원인 제공자를 찾고, 법관 3200여 명을 향해 완전히 새로운 해법을 내놨다면 어땠을까. 시작부터 파열음이 일어났을 것이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티격태격하다 재판만 더 느려졌을 게 뻔하다.
법원장의 재판 참여는 요즘 사법부의 조용한 변화 중 하나일 뿐이다. 조 대법원장은 법원장 추천제를 바로 없애지 않았다. 법관의 추천을 받아 2년 임기의 법원장에 취임해 아직 임기가 남은 법원장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 2년 법원장 추천제를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도태시킬 수 있는데, 굳이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 추천 과정도 비슷하다. 조 대법원장 취임 직전 사법부의 반대로 차기 공수처장 후보가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법원행정처장이 그대로인데, 대법원장이 바뀌었다고 찬반을 바꾼다면 사법부가 권력에 코드를 맞추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먼저 법원행정처장을 바꾸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새 공수처장 후보를 추천하는 길이 열렸다.
일선 근무 때 조 대법원장은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직원들 퇴근이 늦어질까 봐 먼저 청사를 빠져나갔다가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에 다시 들어와 업무를 봤다. 늘 관용차로 출근하다가 대법원장 지명 다음 날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전임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조치들은 그 반대의 방식보다 전임의 흔적을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하게 지우고 있다. 전임과 반대지만 더 빠른 ‘전임 지우기’
그런데도 왜 일도양단식으로 사법부를 화끈하게 바꾸지 않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사법 행정의 고수’로 불리던 고위 법관이 예전에 사법 개혁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법부는 항공모함과 같다. 항공모함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방향을 틀지만 배에 탄 사람들이 흔들림을 느껴선 안 된다.”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한 사회 곳곳의 개혁 움직임을 보면, 최소한의 조치로 예상 밖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용한 혁명’이 비단 사법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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