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년 4월 29일 “흉한 것이 나왔다”… 숙종을 진노하게 한 ‘파묘’[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3일 23시 33분


서울 육상궁(칠궁·사적 제149호) 한 건물의 내부 모습. 육상궁에는 장희빈의 신주를 모신 대빈궁 등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사당이 있다. 동아일보DB
서울 육상궁(칠궁·사적 제149호) 한 건물의 내부 모습. 육상궁에는 장희빈의 신주를 모신 대빈궁 등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사당이 있다.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숙종 22년(1696년) 4월 29일, 장희빈의 아버지 묘에서 흉한 것이 나왔다는 상소를 연서역(서울 은평구)의 생원이 올렸다. 세자를 위협한 행위라는 상소였다.

“우리 동궁의 혈맥도 그 무덤에 서로 이어졌으므로, 이번에 변을 일으킨 자는 틀림없이 국적이니, 여느 요사한 죄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신도(神道)가 편안하면 자손이 길하고, 신도가 어지러우면 자손이 위태하니, 어찌 매우 두렵고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풍수에서 말하는 논리다. 조선은 미신을 탄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였는데, 풍수라는 미신만은 점점 더 흥했다. 그것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 때문이었다. 성리학의 개파조사 격인 정이천은 ‘장설(葬說)’에서 동기감응설(同氣感應說)을 펼쳤다.

“조상과 자손은 같은 기를 공유하는데, 조상이 편안하면 후손이 편안하고, 조상이 불안하면 그 후손이 불안한 것도 같은 이치다.”

성리학의 대가가 이런 주장을 했으니 조선의 유학자들이 너도나도 풍수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명재상 류성룡도 “풍수를 배우지 않아 조상을 흉지에 모시는 것은 병든 부모를 돌팔이 의원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장희빈 아버지 무덤 사건은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 무덤에서는 호패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서인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 응선의 것이었다. 서인은 2년 전 갑술환국으로 남인과 장희빈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한 중이었다. 그 서인에서 세자를 저주했다면 이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 될 터였다.

숙종은 대로하여 응선을 직접 국문했다. 몇 차례나 계속된 고문에도 응선은 연서역 쪽에는 간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사건은 이대로 미궁에 빠질 것 같았지만 한 달가량 지났을 때 새로운 상소가 올라왔다.

장희빈의 당숙인 역관 거부 장현의 묘지기가 수상하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조사한 결과 전말이 드러났다. 일을 주도한 사람은 갑술환국 때 사사된 훈련대장 이의징의 아들 이홍발이었고,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의 처와 첩 등 장희빈 일가가 모두 결탁해서 벌인 일이었다. 서인을 몰아내기 위해서 이홍발이 자기 집 종을 시켜 응선에게 술을 먹이고 호패를 훔쳐냈고, 그 호패를 증거로 무덤 앞에 떨어뜨린 척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장씨 집안이 자기들 스스로 풍수를 해쳐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 자작극이었다. 정말 동기감응 같은 것을 믿었다면 이런 일을 꾸미지도 않았을 것이다. 흔히 미신을 믿는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해 미신이 이용된다. 당사자가 미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분위기가 미신을 신봉한다면 그에 맞춰서 행동해야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 자작극으로 인해 남인은 더욱더 큰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 남인에 우호적이었던 서인 세력인 소론마저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 누군가는 결국 무덤에 나쁜 일을 해서 재앙을 자초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일단 한번 믿으면 잘 변하지 않는다. 미신에 빠지는 것이 이래서 위험하다.

풍수를 소재로 한 영화 ‘파묘’가 천만 넘는 관객을 불러들이며 한국 영화가 고전한 코로나19 이후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새 길을 개척하는 중이다. 영화는 영화로 재밌게 보고, 현실의 풍수에는 코웃음을 치면 좋겠다.

#숙종#장희빈#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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