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역사상 유례없는 사전투표소 불법 카메라 설치 사건이 불거진 뒤 익명을 요구한 선거관리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3일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한된 인력으로 선거를 관리하다 보니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주민센터 등에 불법 카메라가 설치된 걸 선관위가 막을 순 없는 노릇 아니냐”고도 했다.
지자체는 선관위에 화살을 돌렸다. 서울의 한 자치구 관계자는 “솔직히 지자체가 선거를 관리하는 건 아니잖아요. 항상 이런 일이 생기면 선관위는 지자체 탓을 한다”고 했다. 선관위 관계자도, 지자체 관계자도 약속이라도 한 듯 ‘솔직히’라는 표현을 몇 차례나 써가면서 하소연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평소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 왔던 극우 성향 유튜버 한모 씨(49)는 4·10총선 사전투표를 앞두고 서울과 부산, 대구, 인천, 경기 김포 고양, 경남 양산 등 전국 41곳의 사전투표소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한 혐의로 1일 구속됐다. 한 씨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며 “사전투표 인원을 점검해 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범죄자는 엄벌해야 한다. 이와 별개로 여전히 부정선거 의혹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이유가 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2020년 21대 총선 이후 일부 보수 성향 지지자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 무효 소송을 냈다. 이를 대법원이 기각했음에도 여전히 일부 유권자는 한 씨처럼 의구심을 제기한다. 2년 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격리자를 대상으로 사전투표를 실시할 당시 투표용지를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옮기면서 불거진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도 이 같은 의혹을 증폭시켰다.
결국 선관위는 1995년 투표지 계수기를 도입한 지 약 30년 만에 개표 사무원이 일일이 투표지를 직접 확인하고 손으로 세서 확인하는 수검표 절차를 이번 총선에서 다시 도입하기로 했다. 사전투표함을 보관하는 장소를 24시간 누구든지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폐쇄회로(CC)TV 화면도 공개한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전투표소 불법 카메라 사건을 대하는 선관위의 태도를 보면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4년 전 총선에서도, 2년 전 대선에서도 결국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대책을 내놓은 것도 미덥지 않은 판국에 투표소 부실 관리 책임을 지자체 탓으로 돌리고 있어서다. 선관위는 지난달 31일 “투표소 점검 체크리스트에 불법 카메라도 점검 사항에 포함하겠다”고 했다. 불법 카메라 설치 사실이 드러난 지 3일 뒤에 나온 조치다.
선거와 관련된 모든 사무는 선관위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인원이 부족하다고 탓할 게 아니라 누구든지 정해진 대로 사전에 점검하고 관리할 수 있는 디테일한 매뉴얼을 제대로 만드는 게 우선이다. 전국 4425만 명의 유권자가 안심하고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선관위는 이제라도 빈틈없이 선거 관리에 임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주인이 유권자인 국민이라면, 선거 관리의 주체는 선관위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