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은 역대 최고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예산 비효율을 이유로 올해 국가 R&D 예산을 대폭 줄였던 정부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3일 대통령실은 “세계가 기술 경쟁에 뛰어드는 유례없이 빠른 기술 변화의 파고 속에서 개혁 작업에 매달릴 수만은 없다”며 “대폭 증액을 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고 했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올해 들어 갑자기 격화된 것은 아닌데, 1년 만에 R&D 예산을 줄였다 늘렸다 하는 형국이 됐다.
▷지난해 R&D 예산 삭감은 갑작스럽게 진행됐다. 지난해 6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였다. 이는 ‘R&D 이권 카르텔’ 논란으로 이어졌다. 증액 기조로 예산안을 짜놨던 정부는 부랴부랴 일괄 삭감 작업에 들어가 두 달 만에 전년 대비 16.6%(5조2000억 원) 줄인 예산안을 들고나왔다. 국회에서 6000억 원 증액돼 최종적으로는 4조6000억 원 깎였다.
▷외환위기, 금융위기에도 늘었던 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줄자 과학기술계의 충격은 컸다. 연구비가 20%씩 일괄 삭감된 대학 연구실은 부족한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실험은 제쳐두고 신규 연구과제 확보에 혈안이 됐다. 연구비가 대폭 깎이거나 과제가 중단된 연구실에선 연구원과 학생들의 인건비가 삭감됐고, 계약을 연장하지 못해 연구실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카르텔’ 논란에 휩싸인 과학기술계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한국이 R&D 예산을 줄일 때 경쟁국들은 투자를 늘렸다. 이달 초 중국은 올해 과학기술 예산이 3708억 위안(약 69조 원)으로 지난해보다 10% 증액됐다고 밝혔다. 한국의 올해 국가 R&D 예산 26조5000억 원은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의 지난해 R&D 예산(약 30조6000억 원)보다도 적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가 중요 과학기술 11대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 수준이 처음으로 중국에 추월당했는데 격차가 더 커질까 두렵다.
▷정부가 뒤늦게 예산 복원을 선언한 것은 다행이나 과정은 매끄럽지 않다. 올해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2주 뒤인 올해 1월 4일 첫 민생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은 “재임 중 R&D 예산을 대폭 늘리겠다”고 언급했다. 증액 규모에는 ‘상한선’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과학계 카르텔 문제가 해소된 것인지 이렇다 할 설명은 없었다. 예산 삭감 때 불통 지적을 받았다면 예산을 늘리고 정책을 개선·보완하는 과정에서라도 현장과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무줄 예산’ ‘병 주고 약 주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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