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사, 부담이지만 챙길 수밖에 없는 이유[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7일 23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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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퇴직 후에 먼저 오는 연락이 줄어든다는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끊기지 않는 소식이 있었다.

그날 아침도 그랬다. 잠도 덜 깬 이른 시각에 느닷없이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역시나 부고 문자였다. 옛 직장 동료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게 먼저인데 어찌할까 걱정부터 되었다. 불과 열흘 전에 그 동료의 자녀 결혼식에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형편 이상의 축의금을 전달한 후라 예정에 없던 조의금이 부담스러웠다. 이번엔 얼마나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달 생활비 예산이 초과되어 더욱 그랬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많은 전문가들이 퇴직 후에는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단골로 등장하는 비용 중 하나가 경조사비이다. 하지만 막상 퇴직하고 보니 경조사비는 결코 쉽게 줄일 수 있는 지출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간혹 어쩔 수 없이 내고 난 다음에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퇴직자들에게 경조사는 어떤 의미일까. 퇴직하고 한참 뒤에야, 나는 퇴직자들이 경조사비를 줄이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첫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퇴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무엇보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회사가 떠났다. 직장과 멀어지자 사람들과도 멀어졌다. 퇴직 후 주변에 남은 이들이라고는 가족과 몇 안 되는 친구가 전부였다. 넘쳐나는 날들을 혼자 보내려니 너무나도 외로웠다. 이러다 영영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어떻게든 곁에 있는 사람이라도 지켜내고 싶었다. 누군가와 연결되는 기회라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게 경조사는 사람을 만나는 몇 안 되는 자리였다. 오래간만에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웃고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간 말할 곳이 없어 묵혔던 이야기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사는 얘기를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진짜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회사를 떠났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은 채 현실의 무게를 벗어 던질 수 있었다.

둘째,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체면 때문이었다. 회사를 나오니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혹시 나를 측은하게 볼지도 몰라 걱정이 되었다. 변함없이 건재한 모습을 보이려면 이전의 위치에 걸맞은 성의 표시는 해야 했다. 그래도 한때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모른 척한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만났다가 괜히 불편한 사이가 될 수는 없었다. 다른 지출을 줄일지언정 당장은 직장인 시절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싶었다.

실제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적이 있었다. 한번은 선배 자제분의 결혼식에 갔다가 난처한 일을 겪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가 대뜸 나더러 많이 바쁘냐고 물었다. 자신의 장인상에 내가 참석하지 않아서 바쁜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퇴직 이후로는 소득이 줄어 꼭 참석해야 하는 경조사만 챙기려고 한 것뿐인데,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단돈 몇만 원에 이래저래 이미지만 구긴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있을 나의 경조사 때문이다. 언젠가는 부모님도 떠나실 테고 아이 혼사도 치러야 했다. 큰일을 맞았는데 손님 없이 한가하다면 내 빈약한 인간관계가 드러날 게 뻔했다. 특히 아이 결혼식에서 북적거리는 사돈댁과 비교당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민망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인들 경조사에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상부상조라도 해야 했다. 왜 하필 퇴직 후에 집안 경조사를 줄줄이 치러야 하는지,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시점이 얄궂게 느껴졌다.

경조사에 대한 고민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난해 재정 악화 시 줄이고 싶은 비용을 묻는 조사에서 50대와 60대는 각각 14%, 16%로 경조사비를 꼽았다. 이는 다른 연령대와 비교하여 높은 수치로 퇴직자가 경조사비에 대해 갖는 부담을 엿볼 수 있다. 회사에 다녔을 때는 매달 수입이 있어 과한 지출도 일정 부분 회복할 수 있었지만, 퇴직 후에는 전혀 달랐다. 갑작스럽게 경조사가 몰리기라도 하면 시름만 깊어 갔다.

경조사에 대해 고심하던 내게 그 해답을 찾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에 나는 친정아버지를 먼 곳으로 보내드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핑계로 어느 분까지 알려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가까운 친지들에게만 알리고 장례를 치르는데 예상대로 분위기가 썰렁했다. 장례식 손님은 자식들 손님이라고 했던가, 떠나시는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나를 감동시킨 한 분이 계셨다. 다름 아니라 친정엄마와 가까운 동네 친구분이셨다. 그분은 며칠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 끝에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하시며 내내 엄마 곁을 지켜주셨다.

그때 깨달았다. 경조사를 치르는 입장과 손님으로 참여하는 입장은 서로 달랐다. 손님으로 가는 경우에는 돈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여겨졌지만, 경조사를 준비하는 상황이 되어 보니 금액보다는 찾아주시는 발걸음이 훨씬 귀했다. 하마터면 외부 손님 하나 없었을 분위기에서 엄마 친구분의 방문은 정말 소중했다. 자칫 적적하게 가실 뻔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이승 길이 덜 외로우셨을 것 같았다. 남은 가족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를 통해 지난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연락을 받으면 액수부터 생각하고, 경조사비만 보내면 도리는 다했다고 생색냈던 과거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퇴직 후 경조사, 이제부터 돈보다 마음을 더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연락하는 분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불필요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하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겉치레가 아니라 경조사의 진정한 참뜻을 함께 나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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