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이집트 카이로 특파원 시절 정부종합청사 ‘무감마’를 갔다가 ‘영험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비자를 연장하러 갔다가 족히 3, 4시간은 기다려야 할 듯한 긴 줄의 끝에서 한숨 쉬고 있던 내게 한 남성 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비자?”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팔을 끌고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를 뚫더니 별도로 마련된 2층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 앞에서 그는 당시 한국 돈으로 1만5000원 정도를 요구했고 비자 발급은 10분 만에 끝났다. 회사 고참 선배들은 “1970, 80년대 한국 얘기 같다”고 했다.
하지만 2024년 한국 법조계에는 여전히 ‘영험함’이 통한다는 믿음이 굳건하다. 그 믿음의 근간은 사건을 맡은 판검사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유죄도 무죄로 만들어 줄 것처럼 믿어지는 전관들이다. 실제로 전관예우가 있든 없든 그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세간에선 영험한 전관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고 이를 돈벌이에 이용한다. 최근 대한변호사협회는 본인이 근무했던 법원 앞에 해당 법원 판사 출신임을 내걸고 영업한 전관 변호사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달에는 검사장 출신이 사건을 맡아줄 것처럼 영업해 2200만 원을 받고는 경력이 짧은 변호사를 붙여준 로펌에 대한 징계 절차도 개시했다.
법조계 전관예우야 워낙 오래된 얘기지만 요즘처럼 영업 행태가 노골적인 적은 없었다. 전관 출신 변호사가 판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나 판사 시절 썼던 판결문까지 광고에 동원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로스쿨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2014년 1만8708명이었던 등록 변호사 수가 올해 3월 기준 3만4851명으로 10년 새 2배쯤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진 산물일 수 있다. 혹자는 특별수사의 주력인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가 요즘 ‘돈 되는’ 기업 비리 수사 대신 정치적 사건에 매진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심해졌다고도 한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 대기업이 대검찰청과 일선 수사라인마다 친분 있는 전관 변호사들을 대거 선임하면서 이른바 ‘큰 장’이 서는데 요즘은 전관 시장 자체가 안 좋다는 취지다.
그래도 전관의 영험함에 대한 세간의 믿음은 여전히 굳건하다. 대검 형사부장을 지낸 검사장이자 다단계·유사수신 분야 1급 공인전문검사(블랙벨트) 출신인 이종근 변호사는 지난해 2월 퇴직 후 1년 새 가족 재산이 40억 원가량 늘어 논란이 됐다. 그가 맡은 사건들은 1조 원대 다단계 사기 혐의를 받는 휴스템코리아 사건, 4400억 원대 유사수신 범행을 저지른 아도인터네셔널 관련 사건 등 서민들의 피눈물이 적셔진 것들이었다.
스스로를 ‘막변’이라 자조하는 지방대 로스쿨 출신 고교 동창 변호사는 최근 의뢰인의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 본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게 전관 아닌 막변의 현실”이라고 했다. 원래 막변은 ‘로스쿨 갓 졸업한 막내 변호사’를 칭하는 은어였는데, 요즘엔 어떤 막일이라도 다 맡는다는 의미도 담겼다. 일각에서는 “전관예우는 똑똑한 판검사들이 공직에 있어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벌어 온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는 시각도 없진 않다. 하지만 밥벌이를 위해 늘 아쉬운 소리를 입에 달고 몸을 낮춰야 하는 막변이나 평범한 직장인과 달리 판검사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게 직업인 것 자체가 세상사에서 돈과 바꿀 수 없는 큰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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