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로 마무리된 총선 레이스에서 여야는 서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 댔다. 비판의 지점이나 내용은 서로 달랐는데 딱 한 번 워딩이 일치한 적이 있다. “저들이 이기면 한국이 아르헨티나(또는 베네수엘라)가 될 것”이란 얘기였다. 여야가 쏟아낸 감세와 개발, 현금살포 등의 공약이 모두 현실화한다는 불길한 시나리오를 가정하면 지나친 걱정도 아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여야의 총선 개발공약이 2239개, 소요 예산은 최소 554조 원으로 추산했다.
청구서로 돌아올 수백조 ‘묻지 마’ 총선 공약
지금까지 이런 선거가 있었나 싶을 만큼 돈 풀기 공약이 난무했다. ‘묻고 더블로 가’ 식의 도박판을 연상케 했다. 한쪽에서 철도 ‘부분 지하화’를 들고나오면 다른 쪽에선 ‘전부 지하화’로 맞섰고, ‘경로당 주 5일 공짜 점심’ 공약에는 ‘주 7일 공짜’로 응수했다. 급기야 더불어민주당은 ‘민생회복지원금’ 13조 원쯤은 소양강 물에 던지는 돌멩이 하나 정도로 여기는 대범함을 보였고, 국민의힘은 조세 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부가가치세 인하 카드를 꺼내는 대담함을 보였다.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초부터 지난달 말까지 24차례에 걸쳐 민생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돈 풀기 약속을 했다. 너무 많아서 집계조차 어려운데 정부가 후속 조치를 위해 추린 과제만 240개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토하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고 했으니 부처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해야 한다.
재원 마련 방안이 없거나 세수 펑크가 우려되는 ‘묻지 마’ 공약들은 이제 곳간지기인 기획재정부에 고스란히 청구서로 돌아오게 됐다. 지난달 윤 대통령은 기업 출산장려금 비과세 혜택에 대해 “기재부에서 우리 장관님이 시원하게 양보했다”고 했는데, 기재부로선 단순한 칭찬으로 들을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대통령실과 여야에서 ‘통큰 결단’ ‘쿨한 양보’를 압박할 일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는 호통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기재부도 대비하고 있긴 하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달 초 간부회의에서 “기재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다음 달 재정전략회의, 7월 세법 개정안 발표 등 기재부가 챙겨야 할 이슈가 이어진다. 한정된 재정 상황 속에서 총선 기간 쏟아진 약속을 해결하고 경제의 미래 먹을거리를 챙기려면 우선순위를 가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꼼꼼한 검토 과정이 필요하다.
걱정되는 것은 현 정부 들어 기재부가 곳간지기로서의 결기를 보여준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상장주식 양도소득세를 내는 대주주 기준을 완화할 때도,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을 밝힐 때도 대통령실의 뜻에 따라 기존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꿨다. 부담금 제도 개편 등도 대통령이 지시하면 한두 달 내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대통령실에서 화두를 던지면 최소한의 검토와 고민도 없이 그대로 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쿨한 양보’ 요구 맞서 곳간 지킬 소신 보여야
기재부가 경제 정책을 총괄하고 건전 재정을 수호한다는 자존심과 소신이 있다면 무리한 요구에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저항해야 한다. 최소한 ‘밀당’이라도 해야 한다. 여야도 재정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유지하도록 강제하는 재정준칙의 입법화를 통해 곳간지기에게 명분과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흥청망청 총선 파티는 끝났다. 이젠 나라 곳간을 손쉽게 털려는 유혹에 맞서 다시 한번 빗장을 걸어 잠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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