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약속 남발하는 정치인의 ‘종특’
수요 늘리는 정책 펴며 ‘金사과 잡겠다’
경제 원칙 어긋난 공약 결국은 탈나
유권자가 허구성 꿰뚫어보고 가려내야
‘케이크를 갖고 있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는 없다(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맛있어 보인다고 입에 냉큼 넣어버리면 케이크는 없어진다. 아끼고 남겨두려면 먹어치워선 안 된다. 상충하는 인간의 욕심을 동시에 만족 시킬 방법은 없다는 교훈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게 ‘종특’인 직업군이 있는데, 바로 정치인들이다. 그래서 실현 불가능한 정치 공약(空約)을 ‘케이키즘(Cakeism)’이라고 한다.
전쟁과 이상기후, 코로나19로 풀린 돈 때문에 세계는 3년 넘게 인플레이션과 전쟁 중이다. 금리를 높여 통화량을 줄이고, 공급을 늘리거나 수요를 억제하는 게 답이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나만의 해법이 있다’고 자신한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내 재임 땐 인플레가 없었다”고 한다. 자기 사인을 넣은 수표를 미국 전 가정에 돌려 인플레를 유발한 그가 하긴 낯 뜨거운 말이다. 재선되면 모든 수입품 관세를 10%포인트 올리겠다는데, 틀림없이 물가가 오를 것이다. 그래도 미국 유권자 절반이 지지한다.
실현할 수 없는 거짓 약속은 언젠가 탈이 난다. ‘물가를 낮추려면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황당한 지론을 펴던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그런 경우다. 결국 올해 3월 기준금리를 연 50%까지 올렸지만 70%에 육박하는 물가 상승 때문에 이달 초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래도 11개월 전 튀르키예 유권자들은 저금리를 고집하고, 현금을 집어주던 그에게 표를 던져 정권을 연장시켰으니 그로선 남는 장사였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한국에선 금(金)사과를 둘러싼 케이키즘이 기승을 부렸다. 수입을 막아 놓은 상태에서 이상기온, 병충해로 수확량이 30% 감소한 사과 공급을 당장 늘릴 순 없다. 그럼 수요라도 줄이거나, 분산시켜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을 무제한·무기한 투입해 값을 낮추게 했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생활필수품 부가가치세를 한시 인하하자고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인당 25만 원씩 13조 원의 지원금을 나눠줘 돈 없는 사람도 사과를 사먹게 하자는 쪽이다.
정부 안정자금, 여당의 부가세 인하는 잠깐은 값을 끌어내릴 순 있어도 사과를 챙겨먹지 않던 이들까지 사먹게 만들어 결국 가격을 다시 높인다. 야당 지원금은 사과뿐 아니라 다른 물가까지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국민은 결국 자기 세금이 듬뿍 들어간 사과를 먹게 된다.
여야 정치권이 표가 떨어질까 봐 총선 공약에서 빼버린 국민연금 개혁도 케이키즘이 자주 끼어드는 사안이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소득의 9%인 보험료율을 12∼13%로 올리면서 40%인 소득대체율을 놔두거나, 50%로 높이는 방안을 제안했다. 2055년인 연금고갈 시기를 고작 7∼8년 늦춰 개혁안이라 하기도 민망하다. 이미 국민 대다수는 지금 20대 청년이 60대가 됐을 때 연금이 바닥나는 걸 안다. 개혁에 실패하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월급의 40%를 부모, 조부모 세대에 나눠줘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야는 보험료는 조금 올리고, 받는 돈은 안 줄이고, 연금고갈도 막을 수 있는 신통한 수라도 있는 양 결정을 미뤄왔다. 요즘 정치권 탓만 하기 힘든 게, 지난 정부 때 문재인 대통령도 보험료율 인상안이 담긴 개혁안에 퇴짜를 놨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는데 실은 그저 정치인들의 눈높이였을 뿐이다.
더욱이 여소야대가 예상되는 이번 총선의 판세를 고려할 때 여야가 쏟아낸 수많은 약속들은 앞으로 3년간 먹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떡이 될 공산이 커졌다. 한 위원장은 “여당인 우리 정책은 현금이고, 민주당 정책은 약속어음”이라 하지만, 과반 의석을 못 얻고, 야당과 타협도 할 수 없으면 입법이 필요한 공약은 모두 공염불이 된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때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이 불가능할 것이란 당내 비판에 “나는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 그라도 예산권과 법안 거부권을 가진 정부를 상대하면서 돈 풀기 공약을 실현할 방법은 없다.
“케이크를 갖는 것도, 먹는 것도 지지한다”는 말을 했던 정치인이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옹호하던 그는 EU 탈퇴와 영국 경제의 번영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지금 영국인의 다수는 8년 전 브렉시트 투표에 찬성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오늘 총선에서 우리 유권자들은 떡을 먹게도, 갖게도 해준다는 정치권의 거짓 약속을 꿰뚫어보고, 나중에 가슴 치며 후회할 선택을 피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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