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유종]‘아시아 뉴7’ 진출은 화교에 대한 이해부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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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디르만 중심업무지구(SCBD)’. 면적 45만 m²(약 13만6000평)에 글로벌기업 사무실과 아파트, 쇼핑몰 등이 우뚝 솟은 마천루 지구다. 명품 옷을 걸치고 값비싼 액세서리를 장식한 젊은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현지에서는 ‘SCBD 스타일’로 불린다. SCBD를 개발한 주체는 정부가 아니다. 한 화교 출신 기업인이 부지를 사들여 1987년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통째로 개발했다.

미중 갈등과 중국의 경기 둔화가 장기화하면서 수출 한국의 대안시장으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동남아 경제는 일찌감치 화교들이 장악했다. 인도네시아에선 인구 3%가 채 안 되는 화교들이 경제의 70, 80%를 지배하고 있다. CP, TTC, 센트럴 등 태국의 3대 재벌 기업은 모두 화교 가문 소유다.

화교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화교 네트워크의 핵심은 혈연, 지연, 업연이다. 같은 화교라도 동향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푸젠(福建) 출신은 무역, 금융, 유통, 운수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광둥(廣東) 출신은 금은 세공, 유리 제조, 건설, 호텔에서 활약했다. 화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대형 쇼핑몰을 개발할 때는 화교계 은행인 OCBC, 싱가포르 대화은행(UOB) 등을 활용해 투자금을 모으고 수익을 공유한다.

철저한 현지화도 추구했다. 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이름까지 태국식으로 바꿨다. 세대가 넘어가면서 현지 사회에 동화되고 흡수되는 사례도 많아졌다.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민니와 보이그룹 GOT7의 뱀뱀, 2PM의 닉쿤은 모두 화교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정계에도 진출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조부는 푸젠 출신이고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와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부계도 중국에서 이주했다.

동남아 시장에 안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화교들이 덜 진출한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 도요타, 미쓰비시 등은 1960년대부터 태국에 공장을 세우고 동남아 자동차 시장을 장악했다. 화교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투자할 수도 있다. 화교 기업들은 금융, 유통, 부동산 중심이라 제조업이나 디지털 분야에선 상대적으로 약하다. 다만 이들도 확장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맞으면 전략적 제휴를 한다. 일본 유통기업 이온은 화교계 기업 시나르마스와 함께 자카르타에서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화교의 영향력이 덜한 곳을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 기업인의 성공 사례도 있다. 오세영 코라오(LVMC) 회장은 공산국가라 화교들이 거의 없었던 라오스에서 중고차 수입상으로 출발해 완성차 제조사, 은행 등을 아우르는 라오스 최대 민간기업을 일궜다.

동남아 진출 모범 사례는 하나 더 있다.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코린도는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인종 폭동 당시 화교들과 일본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현지에 그대로 남았다. 코린도는 원목 개발과 합판, 제지 등 수직 계열화를 구축하며 한때 인도네시아 재계 순위 20위권에도 오르기도 했다. 앞으로 동남아에서 화교를 뛰어넘는 더 많은 코린도와 코라오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동남아 진출#화교#아시아 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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