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신기하다. 계절마다 딸네 집에 올 뿐인데 10년쯤 산 나보다도 우리 동네 사정을 잘 안다. 하루는 개운하게 말간 얼굴로 말했다. “골목에 허름한 목욕탕 알지? 굴뚝에 옛날 글씨로 ‘목욕탕’ 쓰여 있잖아. 여기 올 때마다 가잖아. 겉은 허름해도 안은 70, 80년대 옛날 목욕탕 그대로라 좋아. 새벽 시간엔 주로 시장통 할머니들이 오시더라. 그래도 몇 번 마주쳤다고 할머니들이 탕에서 고개 빼꼼 내밀고선 ‘딸네 왔나 보네’ 인사해 주더라.”
또 하루는 꽃 화분을 껴안고 온 엄마가 얘기하기를. “가판에 화분만 잔뜩 키우는 슈퍼 있잖아. 한겨울에도 비닐 덧대다가 정성으로 돌보길래 궁금해서 들어가 봤지.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주인이 우리 동향 사람인 거야. 인생 밑바닥까지 겪어보고선 사람이 싫어서 연고도 없는 동네에 흘러왔댄다. 근데 돌보는 화초들이 너무 싱싱하고 예쁜 거야. 식물은 거짓말 안 해. 정성으로 꽃 돌보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거든. 알고 보니 거기가 어르신들 사랑방이더라.”
사계절 꽃 화분으로 뒤덮인 구멍가게. 낡은 자판기 앞에 내어둔 의자에 노인들이 쉬어가곤 했다. 엄마는 대체 그런 델 어떻게 찾아가고 속 깊은 대화까지 나누는 걸까. 유심한 발견과 다정한 참견이랄까. 엄마의 그런 면이 너무나 신기했다. 비결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엄마랑 시장 과일가게에 갔다. 근처 마트보다 저렴하고 맛있어서 일부러 찾아가는 가게였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말했다. “아까 과일들 일일이 만져보고 담아주는 거 봤지? 주인이 무뚝뚝해도 너 알아보곤 마음 써주시더라. 담엔 골라준 과일 맛있다고 한마디라도 해드려. 좋은 얘기는 먼저 꺼내서 칭찬해 줘. 사람 마음이 겨우 말 한마디에 좋아진다. 마음이 활짝 열리거든.”
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가게 주인이 나를 알아보는지, 좋은 과일을 골라주는지. 당연한 손님 응대가 아니었구나. 며칠 뒤 과일가게에 들렀다. 정말로 주인이 과일들 만져보고 골라 담아주기에, 주저하다가 엄마가 알려준 대로 말을 건넸다. “사장님이 골라준 과일들 맛있게 먹고 있어요. 감사해요.” “어유, 찾아와 주니 내가 더 감사하죠.” 뚝뚝했던 주인이 방그레 웃으며 과일값 3000원을 마저 깎아주었다.
장바구니에 담긴 둥그런 천혜향을 만지작거리며 동네를 걸었다. 마음이란 아마도 이런 모양일까. 우둘투둘 딱딱한 껍질도 까보면 속은 말랑하고 달콤할 테지. 마음은 내어 줄수록 잘 영글어 다정한 것이 된다. 기분이 좋았다. 요 앞에 단골 가게가 생겼는데 거기 주인이 골라줬다고. 과일 까먹으며 가족들한테 얘기해 줘야지. 좋은 건 나눌수록 더 좋아지니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