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곽도영]여소야대 시즌2에 ‘사팔뜨기’ 신세 기업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2일 23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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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도영 산업1부 기자
곽도영 산업1부 기자
총선을 열흘여 앞둔 시점인 지난달 27일 오전, 현대자동차(3년간 68조 원)와 LG(5년간 100조 원), 쿠팡(3년간 3조 원)이 ‘짠 듯이’ 중장기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오후 윤석열 대통령은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열고 “첨단 신산업을 중심으로 기업의 투자도 크게 확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전에 발표된 현대차, LG, 쿠팡의 투자 계획을 조목조목 짚었다. 4대 그룹 중 이날 별다른 발표를 내놓지 않았던 삼성과 SK에 대해선 “(1월 열린) 제3차 민생토론회에서 반도체 메가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47년까지 622조 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고 언급했다.

기업인들은 이 숫자들이 새로울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대부분 기업은 3개년, 5개년 치의 중장기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 목표를 수립해 두고 외부 조건 변화에 따라 상시로 조정한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없던 게 생겨난 게 아니란 의미다. 그래서 이번 현대차와 LG가 발표한 숫자도 윤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 내놨던 ‘5개년 투자 계획’ 당시 산정 범주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약 일주일 앞두고 각 기업에는 정부발로 “투자 계획 발표를 준비하라”는 ‘시그널’이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시그널이 내려오면 기업들은 기존의 숫자들 중 어떤 부분을 어떻게 포장해 어느 정도 무게감으로 보내야 하는지, 타 그룹은 어느 정도로 맞추는지 대내외 대응 여력을 총동원한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정권을 잡아 믿을 곳이란 기업들밖에 없는 정부는 첫 2년간 때로는 비서관실을 통해, 때로는 유관 부처나 경제단체를 거쳐 자주 이런 시그널을 내려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의 처신을 더욱 복잡하게 했던 건 거대 야권이다. 정부 제스처에도 발맞춰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발 벗고 나서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거대 야당이 부담스럽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월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사퇴 이후 8개월을 끈 4대 그룹의 한경협 복귀다. 주요 그룹 회장들이 참여하는 대표 경제단체로서 전경련의 회복은 산업계와의 소통 창구를 확대하려는 현 정부 방향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언제라도 야권의 표적이 될 수 있어 4대 그룹은 막판까지 눈치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소야대 시즌2’가 열린 지금 재계의 시름은 더욱 깊다. 기업 입장에선 양쪽 장단에 맞춰 ‘사팔뜨기’를 해야 하는 기간이 3년 더 늘어난 셈이다. 한 4대 그룹 관계자는 “윤 정부 출범 이후 21대 국회 내내 행정부와 입법부 눈치를 번갈아 봐야 했다. 정부 요구에 맞추다 보면 국정감사 때 여지없이 의원들에게 두들겨 맞는다”며 “22대 국회도 큰일”이라고 했다.

더 답답한 건 윤 정부가 정작 기업에 화답하긴 더욱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21대 국회가 다음 달이면 문을 닫는데, 정부가 산업계 핵심 정책으로 발표했던 규제 철폐와 첨단전략산업 지원 관련 법안 상당수는 여전히 국회에 발이 묶여 있다. 당장 총선 결과를 받아 든 기업들은 반도체 설비투자 15% 세액공제 일몰 연장이며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지원 등이 정부 발표대로 이행될지 의심하고 있다.

이제 총선은 끝났다. 표를 얻기 위해 무리하게 여론전을 펼 필요도 없다. 여당도, 야당도 경제를 살리는 데 주력해주길 재계는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여소야대#사팔뜨기 신세#경제#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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