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살면서 다들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질문이다. 혹시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 아닐까. 인간이 늘 변하고 있다면, 차라리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무엇으로 변신할 것인가.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은 욕망만큼 강렬한 것이, 자기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다.
실로 변신은 문학과 예술의 역사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소재다. 동양 설화 속에서 너구리와 여우 같은 동물은 종종 다른 존재로 변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단군 신화에서도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지 않던가. 장자의 ‘호접몽’에서도 인간이 나비로 혹은 나비가 인간으로 변신하지 않던가. 그리스 신화 속에도 변신 이야기가 가득하다. 제우스는 에우로페를 유혹하기 위해 흰 소로 변하고, 레다를 꼬시기 위해 백조로 변한다. 성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돔을 탈출하던 롯의 아내가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소금기둥으로 변한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로 변하고, 하이드는 지킬 박사로 변한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최고로 용맹한 영웅이여, 이 세상에는 한 번 모습을 바꾸면 그대로인 존재도 있는 반면, 여러 모습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도 있소.”
이것이 예술이나 신화의 세계에서만 일이겠나. 누구에게나 변신의 경험이 있다. 다들 취업 면접장이나 입학 면접장에서 멀쩡한 사회인처럼 변신하지 않나. 배고플 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한 마리 짐승이 되지 않나. 만취하면 개가 되지 않나. 수십 년 전 사진을 보면, 스스로 뭔가 다른 것으로 변해 버렸음을 느끼지 않나. 짧은 기간 내에 체중이 수십 kg 늘었거나 빠졌다? 이것도 변신이 아닐까. 어느 소설에선가, 배우자 체중이 수십 kg 늘어난 것을 본 뒤로, 외계인을 보아도 놀라지 않게 된 사람이 등장한다. 나 역시 변신을 경험한 적이 있다. 돌, 그것도 웃는 돌로. 뒤늦게 미국으로 유학 가서 수업을 듣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들리지 않아 웃는 돌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경로로 외국어와 외국 문화에 접할 기회가 늘었다고 하니, 웃는 돌로 변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겠지.
왜 변신하는가. 변신의 원인과 이유는 다양하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혹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변신한다. 제우스는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변신한다. 다프네는 아폴로의 구애를 피하기 위해 변신한다. 단군 신화의 곰은 (열등감으로 인해?) 더 나아지기 위해 인간으로 변신하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원인에 의해 변신이 일어나기도 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그냥 어느 날 아침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변신에 대해 유독 깊이 탐구한 한국의 예술가가 김범이다. 김범이 보기에,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인간이 될 수 있다. 실로, 김범의 작품 세계 속에는 다양한 사물들이 인간이 되는 과정에 있다. 1995년 작 ‘임신한 망치’에서는 망치가 임신을 한다. 1994년 작 ‘기도하는 통닭’에서는 통닭이 기도를 한다. 2006년 작 ‘잠자는 통닭’에는 잘 익은 통닭 한 마리가 잠들어 있다.
김범의 작품 세계 속에서 인간 역시 다양한 사물로 변하는 과정에 있다. 그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아티스트북 ‘변신술’(1997년)이다. “이 책은 기존의 자연물과 인공물 가운데 기본적인 예가 될 수 있고, 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골라, 필요에 따라 그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기술한 지침서이다.” 그리하여 ‘변신술’은 인간이 나무가 되는 법, 문이 되는 법, 풀이 되는 법, 바위가 되는 법, 냇물이 되는 법, 사다리가 되는 법, 표범이 되는 법, 에어컨이 되는 법을 차분하게 안내한다. 이 다양한 리스트에 분명히 빠져 있는 것은 ‘신이 되는 법’이다. 신을 닮아가고자 한 인류 문명의 오랜 시간을 떠올릴 때, 이것은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인다. 김범이 보기에, 인간의 변신은 그저 “주변 환경을 활용하여 생존율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에 불과하다. 변신은 변신일 뿐 초월이 아니다.
이 변신이라는 주제를 천착하게 되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김범의 2007년 작 ‘10개의 움직이는 그림들’에는 풀 뜯는 기린에 대한 것이 있다. 여러 마리 기린이 나란히 서서 높이 달린 나뭇잎을 뜯어 먹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그런데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기린은 입이 나뭇잎에 닿지 않아 먹을 수 없다. 어쩌면 좋은가. 생물로 태어난 이상, 뭔가를 먹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나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먹는 본능을 채우지 못할 경우 그 본능은 그냥 사라지는 것일까. 나뭇잎에 입이 닿지 않던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기린은 그냥 먹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다음 장면을 보자. 나뭇잎이 높아 먹을 수 없었던 기린은, 표범이라는 육식동물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나뭇잎 대신 옆에 있는 기린을 잡아먹으려 든다.
변신이란 주제를 염두에 두고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성인에 가까운 사람도 있고, 괴짜 같은 사람도 있고, 온순한 사람도 있고, 사나운 사람도 있고, 괴물 같은 사람도 있다. 혹시 주변에 표범 같은 사람이 있는가? 분노로 가득한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그는 자신의 기본적인 열망을 채울 기회를 찾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마리 초식동물처럼 그의 열망은 그저 밥을 먹고 친구들과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 평범한 길이 막혔을 때 그는 죽창을 들기도 하고, 한 마리 사나운 맹수로 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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