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대 갈등을 고려하면 오래 사는 것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결혼해 아이를 낳는 젊은이는 줄어드는 반면 노년 인구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고령화사회가 더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오래 살려는 욕심은 젊은 세대들에게 경제적인 부담만 주는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세대 갈등은 혐오주의로 번지기도 하는데, 이 문제는 어른에 대한 예의를 강조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청춘을 예찬한 글은 많아도 늙음을 찬미한 글은 드물다. 플라톤의 ‘국가’ 앞부분에서는 노년의 장점에 대화가 나온다.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에서 케팔로스는 늙으면 ‘욕정’(성적 쾌락)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노화는 많은 욕망을 내려놓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플라톤의 논의에 공감하면서 인간이 노년에 겪게 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몇 가지 덧붙이며 나이에 따라 인생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유년기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앎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내일이 늘 희망으로 가득 찬 행복한 시기다.
그러나 청년기에는 욕망과 기대가 커지면서 세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불행을 세상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인생에서 의욕이 가장 앞선 젊은 시절이 가장 불행한 시기다. 성욕을 포함해 여러 가지 욕망의 노예로 살기 때문에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년기는 이러한 욕망에서 점차 벗어나는 시기다. 포기할 것은 접고 자신의 그릇에 맞는 일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마흔부터 이러한 자기 성찰이 시작된다. 청년기에는 바깥에 대한 관찰에 의존하지만 노년기에는 내면의 사고에 의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나이가 들수록 젊을 때보다 사물을 훨씬 더 개념적으로 생각하고 연관성을 파악하면서 인생의 전체 맥락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50대가 되어서 과거에 얻은 소재를 바탕으로 훌륭한 문필가나 철학자가 되는 일이 생겨난다.
쇼펜하우어의 글귀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오래 살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짧게 살면 인생의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논리다. 젊은 나이에 인생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경고이기도 하다. 너무 일찍 죽으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도 모르지만 인생 뒷면에 가려졌던 인생의 무상함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몇 살까지 살아야 할까?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그 다음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쇼펜하우어)고 한다. 인생 본문에 들어 있는 참된 의미는 전체 맥락 속에서 제대로 깊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친 충분한 인생 경험과 그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뒤따라야 한다.
노년은 자신의 행복한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늙어야 한다. 마치 충분히 늙어 힘이 빠져야 죽음에 대한 저항이 없듯이 삶에 대한 애착도 점점 줄여 나가야 고통도 사라진다. 젊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삶에 대한 질긴 애착과 죽음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자연사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고통은 삶의 욕망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50대가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견뎌야 한다고 깨닫는 40세부터 시작해 70세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쇼펜하우어 자신도 70세 넘게 살아보고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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