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존경하라’는 기사도… 매너가 신분보다 중요한 시대 예고[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5일 23시 33분


대영주 궁정의 기사도 문화
상류층 드러내는 ‘궁정식 매너’로 “숙녀들 위로, 경건” 등 요구
앙드레, 사랑의 실용적 규칙 제시
다양한 계층 간 구애법도 소개

중세 기사와 여성을 그린 14세기 삽화. 중세 유럽의 매너 하면 떠오르는 기사도는 역설적으로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기사의 전투적 
가치가 사라져 가던 11세기 말부터 문학작품 등에서 흔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유한 영주들이 상류층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만든 
세련된 행동 양식, 기사도의 핵심 덕목은 사랑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중세 기사와 여성을 그린 14세기 삽화. 중세 유럽의 매너 하면 떠오르는 기사도는 역설적으로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기사의 전투적 가치가 사라져 가던 11세기 말부터 문학작품 등에서 흔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유한 영주들이 상류층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만든 세련된 행동 양식, 기사도의 핵심 덕목은 사랑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계급별 구애 ‘궁정식 사랑의 기술’


중세 유럽의 매너 하면 즉각 떠오르는 개념은 아무래도 기사도일 것이다. 하지만 기사도를 명문화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훈시나 로망스 같은 문학작품에서 어렴풋한 상을 도출해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기사도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기사의 전투적 가치가 사라져 가던 11세기 말이었다.》






그 무렵 화폐경제가 도입되고 상업이 성장하면서 군사적 봉사를 토대로 이루어진 봉건적 의존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소수의 부유한 대영주들에게는 오히려 이익으로 작용해서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다. 드넓은 평지에 우뚝 세워진 근사한 성은 그 위상의 상징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수많은 식솔을 거느린 대영주의 궁정은 독보적인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세련된 사교 모임과 오락이 펼쳐졌고 일자리를 찾는 시인과 악사들은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유랑하게 되었다.

그런 대궁정에 예속된 사람들에게는 폭력성을 억누르는 자제심을 비롯해 상류계층임을 드러내는 특정한 행동 양식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쿠르투아지(courtoisie), 즉 궁정식 매너라 불리는 것이었다. 기사도는 쿠르투아지의 세련된 예의범절이 반영된 일종의 사회적 이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기사도의 계율에는 ‘패배한 적에게 자비를 베풀 것’ 같은 전투에 관련된 내용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평화롭고 우아한 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경박한 수다보다 점잖은 침묵, 숙녀들을 위로하는 것, 경건과 기도, 신사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이름을 항상 기억하는 일, 숙녀들을 존경하고 그녀들로부터 선물을 받더라도 키스 이상의 신체적 접촉은 금지한다는 규칙 등이다.

1959년 출간된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의 기술’(1174년) 번역본. 사진 출처 아마존닷컴
1959년 출간된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의 기술’(1174년) 번역본. 사진 출처 아마존닷컴
흥미롭게도 기사도의 핵심 덕목은 사랑이었다. 기사도를 그려낸 중세 로망스는 근본적으로 러브스토리였다. 그런데 스토리는 제쳐두고 사랑의 규칙에만 집중한 작품이 있으니 바로 ‘궁정식 사랑의 기술’(1174년)이다. 저자는 샹파뉴 궁정에서 사제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앙드레로,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라고도 불리는데 카펠라누스는 성(姓)이 아니라 궁정에 속한 사제라는 뜻이다.

앙드레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는 추상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인 답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랑에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이’라고 답하는 식이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람은 ‘진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60세가 넘은 남자나 50세 이상인 여자는 성관계를 가질 수는 있지만, 열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18세가 되기 이전에는 남자 역시 진정한 연인이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사소한 일에도 당황하는 미성숙함이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앙드레는 심지어 사랑의 규칙을 31가지로 정리해 수록하기도 했다. 질투심이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이 강해졌다가 약해졌다가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연인을 의심할 때 사랑이 증가하며, 사랑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 지탱하기 어려워지고, 진정 사랑한다면 연인 앞에 설 때 창백해지게 마련이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는 등이다.

그런데 ‘궁정식 사랑의 기술’이 유독 특별한 이유는 다른 사랑론 저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서로 다른 계층 사이의 구애법을 다룬다는 데 있다.

―귀족 남성이 중류층 여성을 애인으로 삼고 싶다면 평민 여성의 훌륭한 성품이 귀족 여성의 그것보다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라.

―귀족 남성이 같은 계층 여성의 사랑을 구하려고 한다면, 그녀의 귀족적이며 탁월한 예의범절을 칭찬하라.

―최상층 귀족 남성이 중류층 여성에게 구애할 때는 사랑이란 계급과는 상관없고 오직 여성의 아름다움이 자아내는 기쁨이 가장 중요할 뿐이라고 말하라.

―중류층 남자가 같은 계층의 여성에게 구애할 때는 그녀의 집안이나 그녀 자신을 칭찬해야 한다.

―중류층 남성이 현명하고 영리한 귀족 여성의 사랑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자칫하면 그가 아첨에 능하며 그녀를 바보처럼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짧은 내용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중세 말 유럽에 아주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으며, 그들 사이에 구애가 가능할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높은 계급일수록 더욱 엄격한 예의범절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예의는 지배 권력을 받쳐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이때 앙드레는 자신의 직업을 깔보는 귀족 여성에게 항의하는 중간계층 남성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자신은 정직하게 이익을 축적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합하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매너와 인품에서 고귀한 사람이라는 항변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중세의 정교한 신분적 사다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혈통이 준 고매한 신분도 천박하게 행동한다면 무용하다는 인식이다. 이는 동시에 개인의 노력과 인품, 매너가 신분보다 중요해지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대영주 궁정#기사도 문화#궁정식 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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