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 물고기라는 게 있잖아요. 어디든 기형은 꼭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게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나오면 후쿠시마 오염수와 상관없다고 정부가 입증하기는 어차피 어렵지 않겠어요?”
지난해 여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국내 여론이 들썩일 때 더불어민주당 중진 의원이 한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는 실제 인과관계와는 상관없이 기형 물고기를 오염수 문제와 엮겠다는 ‘작전’ 구상을 숨기지 않았다. 방류에 나선 일본은 물론 이를 반대하지 않은 윤석열 정부를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언제까지 반대 목소리를 낼 것이냐는 질문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총선 때까지는 계속 끌고 가야지”였다.
외교, 국방 영향력 급속히 늘리는 日
4·10총선 유세 과정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번 총선은 신(新)한일전”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서 당시 이 중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거 쟁점도 아니었던 외교 사안을 뜬금없이 앞세운 이 대표의 발언은 여당 후보들을 ‘나베’ 등으로 부르며 친일로 몰아세우는 과정에서 나왔다. 한일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은 그때나 이번이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총선 개표가 진행되던 10일, 워싱턴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미일 간 전략적 협력의 새 시대”, “동맹 수준이 전례 없이 높아진 역사적 순간” 같은 표현들이 공동 성명을 장식했다. 양국은 24쪽 분량의 팩트시트에 협력 내용을 꽉꽉 채워 넣었다. 화려한 국빈 만찬과 공연, 선물 교환 등은 윤 대통령이 지난해 먼저 거쳐간 것들이지만 미일 양국의 협력 범위와 깊이, 밀착 속도가 심상치 않다.
일본은 미국·영국·호주의 3국 안보협력체 오커스(AUKUS)에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 참여하는 기회도 얻었다. 오커스 회원국들과 극초음속 미사일을 비롯한 첨단 방위기술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국과 호주의 견제에도 미국이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역할 확대를 노리는 일본은 국방 분야에 거액의 예산을 쏟아붓는 중이고, 미국은 주일미군사령부의 격상을 검토하고 있다.
미일 양국은 더 나아가 필리핀까지 참여하는 3국 정상회의를 열었다. 미일 두 나라를 밑변으로 한 대중(對中) 삼각연대를 구축하는 모양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필리핀은 3국 간 ‘발리카탄’ 연합 군사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축으로 놓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소다자(mini-lateral)’ 협의체를 하나씩 늘려 나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중 갈등이 심화할수록, 북-중-러의 밀착이 강화될수록 미일의 협력 밀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이는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을 더 밀어올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기시다 총리는 기립박수가 쏟아진 미국 의회 연설에서 “일본이 이제는 미국의 지역 파트너가 아닌 글로벌 파트너”라고 했다.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좋든 싫든 더 자주 마주치고 협의해야 할 외교 상대가 된다는 말이다.
‘반일 프레임’ 갇힌 정치로는 대응 못해
제22대 국회에서 활동하게 될 민주당 의원들 중에는 지난해 “국제적 망신”이라는 비판에도 일본까지 날아가 ‘오염수 방류 반대’ 시위를 벌였던 이들이 있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죽창가 선동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본성에 친일적 요소” 운운하며 여당 정치인의 국가관까지 문제 삼는 이 대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이 끌고 갈 192석의 거대 범야권이 정치적으로 단맛을 본 ‘반일’ 프레임에만 갇혀 있다간 한국 외교의 퇴행을 막기 어렵다. 국내 정치를 휘저어 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국가적 손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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