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국의 육해공談]왜 반도체는 비행기로만 실어 나를까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6일 23시 36분


지난해 국내 공항에서 항공기에 실려 해외로 수출된 품목의 총액은 1835억 달러(약 256조 원)였다.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였다. 반도체 품목의 총수출액은 970억 달러(약 136조 원)로 항공 화물 전체 수출액의 약 53%에 달했다. 수출입 통계가 본격적으로 집계되기 시작한 1988년 이후 반도체가 항공 화물 수출액 1위 자리를 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반면, 지난해 국내 항만을 통해 나간 반도체 품목은 16억 달러에 불과했다. 주력 수출 상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항만 수출액은 ‘0’원이었다. 사실상 반도체를 항공기로만 실어 나른 셈이다.

변종국 산업1부 기자
변종국 산업1부 기자
국제 상품 이동의 95%는 항만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왜 반도체만 항공기로 실어 나르는 걸까? 리드타임(주문부터 실제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과 품질 문제 때문이다. 화물기는 배보다 빠르고 운항 일정이 정확하다. 공항만 있으면 세계 어느 곳이든 운송할 수 있다.

반도체는 매우 예민하다. 작은 충격이나 흠집, 심지어 물 한 방울만 닿아도 품질에 문제가 생긴다. 선박은 이송 도중 집채만 한 파도를 만날 수 있다. 염분과 해풍, 고온 또는 혹한의 날씨, 습도 등에 오래 노출되는 건 반도체 품질에 치명적이다.

화물기의 경우 온도와 습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화물기 화물칸의 온도 범위는 4∼29도인데, 조종사들은 반도체를 운송할 때 화물칸 온도를 대개 ‘로(LOW)’ 상태(4∼10도)로 해 놓는다. 반도체 성능에 지장을 주지 않는 온도다. 운항 고도가 높을수록 습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습기 걱정도 없다. 화물기 바닥에는 고박장치가 있고, 상품 자체를 벨트로 여러 번 둘러 꽁꽁 싸매기 때문에 난기류를 만나도 반도체에는 충격이 거의 없다고 한다.

반도체와 항공기는 불가분의 관계다. 화물기를 운용하는 항공사가 있기에 반도체 수출이 가능하다. 반대로 반도체도 항공사들을 먹여 살린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당시 대한항공은 화물 사업 덕분에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했다. 화물 운임이 급등했던 것이 호실적의 가장 큰 이유였지만, 반도체와 같은 국가대표 수출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과다. 대만의 중화항공도 2020년 코로나 위기에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했다. 대만에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 TSMC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반도체를 수출해 왔다. 대한항공은 1971년 처음 화물기 사업을 시작했다. 반도체와 화물기가 서로 없이는 못 사는 관계가 될지 그땐 상상이나 했을까.

현재 아시아나항공의 화물 사업부 매각이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EU)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조건으로 아시아나의 화물 사업 분리 매각 조건을 제시하면서다. 업계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크다. 양사의 통합은 국가 물류망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항공 화물은 사이클 사업이라서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가면서 온다. 적자를 낸 기간도 적지 않다는 의미다. 한 항공업계 임원은 “솔직히 화물은 돈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애국한다는 마음으로 화물 사업을 유지했던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초대형 항공사가 탄생하면 그저 모든 게 좋을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만 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신중히 생각해 볼 문제다.

#반도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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