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일본산 벚꽃 숲 옆에 제퍼슨 기념관
번영 초석 놓은 제퍼슨, 노예와 부적절 관계
美, 일부 문제 삼아 전체 삶 부정하지는 않아
사람 사는 세상은 총선(總選)으로 부산했지만 봄은 꽃의 계절이다. 겨우내 숨어있다가 따사로운 볕과 더불어 점잖게 모습을 드러내는 할미꽃이나 혹은 빛나는 노란색의 아기똥풀꽃은 그 이름도 정겹다. 메말랐던 가지에서 피어나는 나무꽃들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금년에도 개나리, 진달래, 목련 그리고 벚나무 등이 한결같았는데, 그중에서도 벚꽃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듯싶다. 옛날 우리 서원(書院)에서는 젊은이들을 위해 벚나무를 피하고 매실나무를 심었다는데,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화사한 벚꽃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벚꽃을 접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일제(日帝)가 한반도를 침략하면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바꾸고 그곳에 ‘사쿠라’를 대량으로 심으면서 비롯된 것 같다. 그 후 한동안, 창경원 밤 벚꽃 놀이는 서울 시민들의 중요한 축제였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 본토에서도 막부 정권이 소중히 여겼던 도쿄의 우에노 신사를 역시 동물원으로 만들며 여기에 사쿠라를 대량 식수했다. 우에노는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손꼽히는 벚꽃 관광지다. 창경궁에서는 이미 오래전 모두 제거됐지만, 그러나 벚나무는 이제 우리 한반도 곳곳의 공원이나 학교 등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친근한 존재다.
세계적으로 벚꽃의 또 다른 명소는 미국 워싱턴시에 있다. 미국 국민들은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워싱턴, 제퍼슨 그리고 링컨을 꼽는데, 이들을 추앙하기 위해 워싱턴은 수도 이름으로 삼았고 제퍼슨과 링컨은 그 도시 안에 장대한 기념관으로 남겼다. 그런데 제퍼슨 기념관 주위의 광활한 벚나무 숲은 4월이 되면 인파로 북적이는 관광 명소다. 이 숲은 1912년에 일본이 기증한 3000여 그루의 벚나무로 두 나라 간의 친선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제퍼슨 기념관은 1943년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 지역에 건설됐다. 그 후, 미국은 일본과 참혹한 전쟁을 치렀지만 친일(親日)의 상징인 벚나무를 모두 뿌리 뽑자고 목청 높이는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벚꽃은 변함없이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고, 일주일 전에는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또다시 250그루의 벚나무를 기증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 후 초대 국무장관, 2대 부통령 그리고 3대 대통령을 지내며, 번영하는 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제퍼슨의 묘비명, 즉, “미국 독립선언과 종교 자유법의 기초자이며 버지니아주립대의 아버지, 제퍼슨 여기 잠들다”는 생전에 그가 스스로 작성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이렇게 간략하게만 기억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다. 그는 철학, 자연과학, 농학 등 다방면의 권위자였으며, 특히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능력 있는 경영자였다. 이를 토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1803년에 루이지애나 지역 약 200만 ㎢의 땅을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우리 남북한 면적의 거의 열 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그는 농장 경험을 통해 정원 가꾸기가 인간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꽃과 나무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이야기했다. 동시에 농업을 신기술 개발로 국민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핵심 산업으로 여겼다. 땅을 파고 뒤엎는 농사 용구인 쟁기는 생김새나 세부 디자인에 따라 능률이 많이 달라지는데, 제퍼슨은 스스로 쟁기를 발명하고 이에 대해 특허를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모두 앞서는 그의 최고 업적은 인권이란 개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33세의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독립선언서의 한 구절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이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제퍼슨은 당시의 농장에 수많은 흑인 노예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들의 인권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100여 년 전 일이다. 제퍼슨은 1784년에 프랑스 대사로 부임하면서 딸들의 몸종으로 노예를 데려갔는데, 그중에는 14세짜리 흑인 소녀도 있었다. 제퍼슨은 이 소녀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대여섯 명 태어났다. 오늘의 가치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인권유린인데, 그러나 이 때문에 제퍼슨 기념관을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은 없는 듯싶다. 과거 행적의 일부를 문제 삼아 인물 전체를 묻어버리자는 주장이 걸핏하면 횡행하는 우리 사회가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거나 혹은 그 반대 즉,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하는 일은 모두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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