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는 내수가 이끈다. 지난해 4분기(10∼12월) 기준 개인의 소비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68%를 차지했다. 즉, 미 소비자의 편익이 커져야 경제가 성장한다. 소비자 입장에선 미국산에 비해 값싼 해외 상품이 넘쳐나는 게 좋다.
문제는 미 생산자, 특히 백인 노동자 계층이 이 명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데 있다. 그들 또한 한편으론 소비자다. 그러나 이들은 “실업자가 될 판인데 싼 물건이 있어도 살 돈이 없다. 무슨 소용이냐”고 항변한다.
미 제조업 메카였지만 자유무역과 세계화 여파로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벨트’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직접 겪은 현실이기에 경제학적 사실을 거론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종의 ‘확신범’이다.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재집권 시 통상 정책을 관할할 것이 확실시되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러스트벨트인 오하이오주 애슈터뷸라에서 나고 자랐다. 철강업이 발달했던 애슈터뷸라는 1960년대 2만4000여 명이던 인구가 약 3분의 2에 불과한 1만7000여 명으로 줄었다. 본인은 의사 부친을 둔 덕에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고향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이웃과 지인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생생히 목격했다.
이런 그는 자유무역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개념이며 중국은 미국의 적(敵)이라고 확신한다. 헐값에 과잉생산된 중국산 제품이 넘쳐날수록 미 노동자의 삶은 나빠지고 이런 식으로 중국 경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미 민주주의 또한 위협받는다는 신념이 투철하다. 저렴한 가격, 자원의 효율적 배분, 규모의 경제 달성 같은 자유무역의 이점은 경제 원서에 나오지 현실은 다르다는 게 한결같은 그의 주장이다.
그가 트럼프의 재집권 시 1985년 ‘플라자합의’를 다시 추진할 것이란 보도가 잇따른다. 당시 일본, 옛 서독 등에 대한 무역적자로 신음하던 미국은 뉴욕 맨해튼의 플라자호텔에서 엔화, 마르크화 등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라고 압박해 관철시켰다.
특히 USTR의 ‘젊은 피’였던 38세의 혈기 왕성한 공무원 라이트하이저는 일본 측 관계자가 초기에 제시한 협상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해당 문건을 종이비행기로 접어 이 관계자의 면전에 날렸다. 그에게 ‘미사일 맨’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한국은 플라자합의 당시 의도하지 않은 수혜를 누렸다. 일본과의 수출 경쟁 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 가치가 상승해 상대적으로 한국산 수출품의 가격이 싸진 덕이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이 ‘제2 플라자합의’를 추진한다면 패권 갈등 및 무역 전쟁 중인 중국, 엔화 가치가 연일 하락 중인 일본은 물론이고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 또한 거센 원화 절상 압력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내가 해 봐서 아는데…”를 시전하는 이다. 경제적 위용만 놓고 보면 39년 전 일본의 위상은 지금의 중국 못지않았다. 이런 일본을 굴복시켰던 그다. 한국을 얼마나 몰아붙일지 벌써부터 오금이 저린다. 싫든 좋든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밀착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사정 또한 봐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극한 갈등과 분열에 빠진 한국이 이런 라이트하이저를 맞을 준비가 돼 있는지 암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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