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목욕탕 발달했던 곳은 5000여년 전 파키스탄-인더스강
파미르고원엔 온돌과 건식 사우나
한반도-만주 온돌서 기원 가능성
한국은 고대목욕탕 흔적 출토안돼… 물 깨끗해 하천에서 목욕 즐긴 듯
《세계 각지 문명 ‘목욕의 역사’
21세기가 되면서 바뀐 수많은 우리의 생활 중 하나는 목욕이다. 대중목욕탕에서 며칠에 한 번씩 씻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목욕과 샤워는 빼놓을 수 없는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리고 왜 몸을 씻을까. 고고학이 밝혀주는 목욕의 역사를 살펴보자. 목욕의 시작은 몸의 더러움과 감염을 유발하는 이물질을 털어내는 자연스러운 동물적인 습관에서 유래했다. 흔히 ‘고양이 세수’라는 말처럼 동물들도 몸에 묻은 것을 털어내는 행동을 한다. 심지어 바퀴벌레 같은 곤충들도 이물질을 털어내는 행동을 반복한다.》
몸을 씻기 위해서 햇빛에 건조하거나 연기로 훈증하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경우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매우 제한적이었다. 목욕하기 적절한 계절도 드물었고 물과 접촉하면 각종 병이 옮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하천이 대부분 매우 맑은 편이지만 물이 귀한 유라시아 초원 일대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진흙투성이의 강이 대부분이며 고여 있는 경우는 미생물의 번식이 더욱 심하다.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과 도시가 발달할수록 인간은 물론 가축이 함께 살면서 배출되는 오물 때문에 제대로 된 상하수도가 없는 경우에 물의 오염은 심각해진다. 지금도 콜레라나 이질 같은 전염성 높은 수인성 전염병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단축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몸에 작은 상처가 있는 경우 자칫하면 강에서의 목욕이 심각한 감염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나 역시 러시아 유학 시절 시베리아에 발굴을 하러 갔다가 뺨에 모기 물린 상처가 있는 채로 호수에서 목욕한 적이 있다. 며칠 뒤 감염이 심해져 입원해야 했다. 항생제가 없었던 과거에는 강이나 하천에 몸을 담그고 나서 탈이 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 있는 물에 귀신이 살고 있다는 두려움은 상당수 이러한 더러운 물로 인한 폐해 탓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깨끗한 샘물이나 지하수는 생명력의 원천을 상징했다. 러시아 투바에 위치한 3000년 전 스키타이 시대 아르잔 고분은 바로 샘물의 가운데에 무덤이 있다. ‘아르잔’이라는 이름은 성스러운 샘물이라는 뜻이니 바로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깨끗한 샘물에서 목욕하면 병이 낫고 다시 젊어진다는 믿음은 동서를 막론하고 있었다. 기독교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가 목욕을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6세기 독일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은 이러한 믿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오염된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해도 목욕이 주는 상쾌함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목욕은 하나의 문화로 승화되어 고대 문명의 필수 요건으로 등장했다. 가장 먼저 목욕문화가 발달한 곳은 5000년 전 파키스탄과 인도 서북부의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인더스 문명이었다. 성 한가운데에 공동 목욕탕을 설치하고 사교의 장으로 활용했다. 세계 각지의 문명은 자신의 환경에 맞게 목욕과 사우나를 발달시켰다. 깨끗한 물이 없는 지역은 건식 사우나(증기욕)를 발달시켰다. 마야문명 유적에서는 온몸에 머드팩을 하고 건식 사우나를 한 증거도 출토되었다. 유라시아 초원과 같이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건식 사우나를 선호했다. 스키타이인들은 밀폐된 작은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약초와 대마초를 태워서 훈증을 했다. 서양에서 목욕문화를 꽃피운 곳은 로마였다. 지금도 수많은 로마의 건물들에서 빠짐없이 목욕탕이 발견된다.
한편 중국은 상나라 때의 갑골문에 목욕을 의미하는 목(沐)과 욕(浴)이 등장하고 춘추시대에는 목욕탕을 뜻하는 한자 벽(湢)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도 목욕탕의 흔적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는 귀족의 전용일 뿐이었다. 한국에선 고대 목욕탕의 증거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다. 물이 상대적으로 깨끗해 하천에서 씻었을 것이다. 건식 사우나와 같이 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온돌이 발달했던 것도 목욕탕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일 수 있다. 이렇듯 목욕과 건식 사우나는 그 형태는 각기 달라도 세계 전역에서 거의 동시에 유행했고, 지금도 대중목욕탕으로 이어지니 우리의 목욕은 인류 문명과 함께한 셈이다.
목욕탕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토목과 건축 기술의 총아이기도 했다. 특히 이슬람 문명에서 목욕탕은 고도의 건축 기술을 만나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 파미르고원의 입구에 위치한 훌부크성은 서기 10세기 사마니 왕조 후탈라국의 수도이다. 이 험한 고원지대에서 왕국이 번성한 이유는 거대한 소금산 때문이다. 수백만 t의 소금이 거대한 산을 이루는 이 지역은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색깔에 따라 흰 소금은 식용, 붉은 소금은 약, 그리고 푸른 소금은 생산용으로 분류되어 사방으로 팔려나갔다. 험한 고원지대에서 빠르게 성장한 훌부크성이지만 근처 하천은 염분과 진흙이 많아 목욕에 적당하지 않았다. 1970년대부터 고고학자들이 40여 년간 발굴한 결과 훌부크성에서 대형 목욕탕과 건식 사우나 자리가 발견되었다. 목욕탕에 들어갈 물은 무려 20km 떨어진 산맥 자락의 맑은 샘물에서 도관을 연결하여 공급한 것이었다. 동력 엔진이 없던 시절이니 25m 정도의 높이에서 시작한 도자기 파이프는 정교한 설계로 해발고도를 낮추어 가며 궁전에 물을 공급했을 것이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김포시 근처에서 지하수를 끌어와 경복궁에 물을 댄 꼴이다. 이들이 얼마나 깨끗한 물과 목욕을 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바닥에 온돌을 설치해 마룻바닥을 통해 뜨거운 증기를 쐬는 건식사우나실도 발견되었다. 왕궁의 처소 한가운데에는 목욕을 즐기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 시설도 만들었다. 목숨을 걸고 파미르와 톈산(天山)산맥의 험한 실크로드를 넘어선 사신과 상인들이 목욕을 즐기면서 공연을 본다면 크게 즐겁지 않았을까.
훌부크성의 번영은 물의 관리와 함께했다. 소금산 근처에 있었던 만큼 물이 귀해서 빗물을 집수하기 위한 일종의 중수도 시설이 있었다. 성안에서 사용한 생활 오염수도 한번 정화해서 내보냈다. 무작정 물을 버리다가는 주변이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건식 사우나에 사용된 온돌은 이 지역의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극동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유행했던 온돌이 흉노의 영역인 몽골과 바이칼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1800년 전에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한 직후에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바닥으로 온기를 전하는 온돌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목욕탕의 발달은 동서 문명의 교류와 실크로드 발달의 숨은 조력자였다.
목욕에 대한 열망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왔고 또 함께했다. 목욕의 또 다른 장점은 서로의 친밀도를 높이는 데에 있다. 기성세대라면 형제나 부자가 함께 목욕하며 서로의 몸을 닦아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목욕은 단순한 위생적인 목적을 떠나서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친해지는 ‘그루밍’으로 인간 공동체를 일구어내는 비결이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흔해지고 목욕도 개인화되면서 어느덧 사라지는 기억이 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처럼 깨끗한 물을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나라는 극히 일부라는 점이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에서는 물의 부족과 수인성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최초의 목욕탕 문화를 발달시킨 인더스 문명은 약 3500년 전 갑자기 멸망했다. 그들의 젖줄이었던 인더스강이 범람하여 전염병이 창궐하고 물길이 바뀌면서 그들의 찬란한 문화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은 가장 고마운 존재인 동시에 환경이 오염되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인더스 문명이 증명했다. 목욕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당연한 듯 즐기는 목욕은 인간 문명의 결정이며 또한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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