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 돌잔치를 했다. 돌상 위에는 판사봉 청진기 엽전 마패 골프공 명주실 오방색지 등이 올랐다. 돌잡이의 ‘효험’을 믿진 않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제일 좋다는 걸 잡길 바랐다. 내심 솔직한 속내가 발현돼 부(富)를 상징하는 엽전을 쥐여주려 했지만 타고난 재물운이 없는지 끝내 거부하더니 화려한 연예인이 된다는 오방색지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아기가 판사를 뜻하는 판사봉을 잡길 바라는 마음은 솔직히 들지 않았다. 법조인이 될 거라면 판사보단 대형 로펌 변호사가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라는 서울대 출신 법조인은 더 이상 판사를 1순위로 지망하지 않는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신임 판사 중 서울대 학부 출신은 2017년 53%에서 2018년 34%로 급전직하한 후 줄곧 30%대에 그치고 있다. 2018년은 판사 지원 요건을 법조경력 3년 이상에서 5년 이상으로 올린 첫해다. 일정 법조경력이 있어야 판사로 임용하는 이른바 ‘법조일원화’는 판사가 경험이 많아야 판결이 공정할 거란 기대로 2013년 시행됐다. 2013년부터는 3년, 2018년부터는 5년, 2025년부터는 7년 이상 법조경력이 있어야 판사가 될 수 있다. 똑똑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20대 초임 판사가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한 사건을 판결하는 게 공정하느냐는 문제의식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법조일원화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엘리트에게 법복의 명예보다 ‘돈맛’을 먼저 알게 해주는 부작용을 낳았다. 일류 엘리트라도 바로 판사가 될 수 없으니 주로 대형 로펌을 택한다. 대형 로펌 초임 변호사의 월 실수령액은 1000만 원 안팎. 하지만 5년 경력을 쌓고 법복을 입으면 월 실수령액이 수당 포함 400만 원대로 떨어진다. 국가를 위한 사명감이라 위안하기엔 너무 큰 감소 폭이다. 원래 집안이 부자라 급여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거나 유별나게 공직을 선망하지 않는 한 일류 엘리트가 변호사 대신 판사를 택하기 어려운 구조다.
사법연수원 상위권이라면 판사로 지원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 판사가 된 이들도 매년 거액을 제시하는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 시즌마다 흔들리기 일쑤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2월 16일 첫 기자간담회에서 “사법개혁의 핵심은 처우 문제”라며 “싱가포르는 법관 보수를 대형 로펌의 우수 파트너변호사에 준하게 인상시켰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 정서상 최고위 기득권으로 여겨지는 판사의 월급을 2000만 원 이상으로 올리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물론 “판사를 굳이 일류 엘리트가 해야 하느냐”는 반론도 적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는 평범한 사람이 판결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법은 방대하고 복잡하며 허점도 많다. 일류 엘리트가 돈 많은 피의자를 주로 변호하는 대형 로펌으로 쏠리고 판사가 되길 기피하는 경향이 심해진다면 결국 사법 체계를 통한 정의 구현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돈 많은 피의자일수록 엘리트 변호사의 윤활유가 덧발라져 처벌을 피해 가는 ‘법꾸라지(법+미꾸라지)’가 될 확률을 높일 것이다. 딸아이가 진로를 결정할 20여 년 뒤의 대한민국은 엘리트의 뉴노멀(New Normal·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 기준)이 지금과는 달라졌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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