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의 헌신[서광원의 자연과 삶]〈88〉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23일 23시 33분


별의별 일이 많은 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만 자연은 더하다. 워낙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살다 보니 상상 너머의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일본에 서식하는 노린재의 일종인 레드버그라는 곤충도 그중 하나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보통 곤충 어미는 알만 낳고 떠나기에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서로 볼 일이 없다. 볼 일이 없으니 관계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곤충들과 달리 지극정성으로 새끼를 돌본다. 새끼들이 정해진 먹이만, 그것도 딱 입맛에 맞는 것만 먹는 탓에 그 먹이를 찾아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노고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없을 때다. 이제나저제나 배를 채워 줄 어미를 기다리던 새끼들은 어미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미를 찾아 나선다. 먹을 걸 찾으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엄마를 찾아 나서는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이 이들에게도 벌어지나 싶은데, 이들이 가는 곳이 뜻밖이다. 친어미가 아니라 근처에 있는 다른 어미를 찾아간다. 동네 이웃집 찾아가듯 가서 ‘여기 괜찮은데? 이제부턴 여기 살래’ 하는 식으로 눌러앉는다. ‘이 엄마가 아니다’ 싶으면 자신들을 먹여 줄 ‘새엄마’를 직접 선택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어미 역시 이런 새끼들을 받아들여 자기 새끼들과 같이 키운다.

새끼들에게 먹일 걸 찾아 하루 종일 애쓰다 돌아와 보니 새끼들이 자기를 버리고 다 떠나버린 걸 안 어미는 어떨까? 이들에 대한 연구는 없어 모르겠지만 새끼들을 위해 지극정성을 들이는 걸 감안하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돌아서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힘든 건 ‘새엄마’도 마찬가지다. 먹여야 할 입이 두 배로 늘었지 않은가. 더구나 이 ‘새로운 자식’들은 ‘새엄마’라고 달리 대하지 않는다. 친어미에게 했던 그대로 아주 ‘공평하게’ 배고프다고 끊임없이 보챈다. 이러니 날마다 ‘죽을 고생’은 당연지사다.

덕분에 새끼들은 잘 자라지만 어느 정도 성장할 때쯤 되면 죽을 고생을 한 어미들이 진짜 죽는다. 쉬지 못한 탓에 과로사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헌신하는 어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먹이를 갖다 줄 수 없게 되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먹이는.

새끼들이 부모를 선택하는 건 특이한 일이지만 어미들이 새끼들에게 자신의 생을 바쳐 헌신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북태평양에 사는 대왕문어는 10만여 개나 되는 알을 낳은 후 새끼들이 나오는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알을 보살핀다. 자리를 비우는 순간 알을 해치려는 존재들이 있어서다. 이럴 때마다 문어 어미는 무섭게 일전을 불사하지만, 평상시에는 살가운 어미의 모습 그대로다. 수시로 무더기로 있는 알들에 산소가 부족하지 않게끔 신선한 물을 흘려 보내준다. 6개월 동안이나 이러느라 기진맥진해진 어미는 새끼들이 나올 때쯤 고단한 생을 마감한다.

긴 생명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중 하나는 후손을 잘 보살피는 생명체일수록 번성한다는 것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살아가는 일은 어디서나 똑같다. 이런 헌신에 약간의 성의를 보이자는 5월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다.
#곤충#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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