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이래요. 사람이 몰려서 빠져나가기도 힘들어요.”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브루클린 노스 6번가에서 만난 택시기사 후메이얀 씨(27)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 한 블록도 움직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최근 브루클린에서 가장 ‘힙’한 곳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스버그’ 지역이다. 윌리엄스버그는 이스트강을 사이에 두고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와 마주 보고 있는 브루클린 동네다. 20세기 초엔 공장지대였고, 1990년대는 할렘과 함께 대표적 우범지역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젠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세련된 상점들이 즐비해 뉴욕 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이날 방문한 이스트강에서 노스 6번가로 이어지는 중심가는 평소처럼 젊은이들로 크게 붐볐다. 나이키, 코스 같은 글로벌 의류브랜드부터 르 라보, 바이레도, 샤넬뷰티 등 명품 뷰티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가득했다. 마치 맨해튼의 소호 지역을 옮겨 놓은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특히 현지에선 최근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의 상륙이 윌리엄스버그 대변신에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6년 플래그십 매장 개장을 목표로 노스 6번가에 부지를 마련한 에르메스는 최근 인근에 임시 매장을 열어 뉴요커들의 관심을 모았다. 뉴욕타임스(NYT)도 이를 두고 “뉴욕에서 낙후 지역 활성화의 대표 사례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규제 푼 윌리엄스버그의 변신
“창의적인 예술가들은 원래 소호에 살았어. 그런데 너무 비싸져서 트라이베카로 옮겼고, 트라이베카가 비싸지니 브루클린으로 이동했지. 아마 다음은 부모님 집일 거야.”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20년)에서 주인공 개츠비(티모테 샬라메)는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재치 있게 꼬집었다. 비싼 임대료 탓에 터전을 잃어가는 청년들의 설움은 뉴욕이나 서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스버그가 주목받은 것도 이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이었다. 맨해튼에서 밀려난 이들이 유입되며 동네 분위기가 차츰 변해갔다. 과거 번성했던 설탕이나 우산, 섬유 공장이 문을 닫으며 버려진 건물들에, 싼 임대료를 찾아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생기를 찾았다.
결정적 변신의 계기는 2005년에 찾아왔다. 당시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이 지역의 용도변경 규제를 완화한 것이다. 브루클린에서 퀸스에 이르는 이스트강 강변 지대는 원래 산업용도로 묶여 있었으나, 고질적 주택난 해소 및 새로운 산업 유치를 위해 규제를 풀어버렸다. 블룸버그 시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금싸라기 땅인데도 오랫동안 버려졌던 이곳을 쓰레기장이나 발전소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즐기고 일하는 지역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뉴욕시는 이스트강 강변지대를 주거 및 상업 용도로 전환하고, 개발 사업에 뛰어드는 기업에 세액 공제와 인프라 건설 같은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아파트의 30% 가구 안팎을 저소득층을 위한 장기 임대로 구성하면 고도 제한까지 풀어 30∼50여 층 초고층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줬다. 심지어 25년 세액공제 혜택도 제공했다. 장기임대 가구의 확보는 기존에 거주하던 저소득층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파격적 지원 덕에 윌리엄스버그부터 북쪽 그린포인트, 퀸스 롱아일랜드시티 등은 2010년 전후로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시는 공원과 공공 예술에 투자해 강변 풍경을 완전히 바꿔 놨다. 19세기 말 지어졌던 ‘도미노 설탕 공장’은 최신 오피스 빌딩으로 전환됐고, 젊은 중상층 거주자들이 늘어나 소매점들도 덩달아 증가했다. 2017년엔 이스트강을 다니는 수상버스 ‘NYC 페리’도 도입했다.
앤드루 킴벌 뉴욕시 경제개발공사(NYCEDC)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구역 재조정, 세액공제를 통한 대규모 주거개발, 수상 대중교통 도입 등으로 뉴욕 이스트강 강변지대는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탈바꿈했다”고 설명했다.
●“도시 개발의 핵심은 대학”
뉴욕 강변 개발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17일 찾은 맨해튼 남쪽 섬 거버너스아일랜드 역시 새로운 변신을 기다리고 있다. 강물과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면적 약 70만 ㎡의 섬으로 월가에서 남쪽으로 800여 m 떨어져 있다. 여의도의 약 25% 크기인 이곳은 남북전쟁 시절 남부군 감옥이 있었으며, 18세기 이후 미 군부대가 주둔하던 미개발 지역이다.
현장에서 만난 새러 크라우트하임 거버너스아일랜드재단 부대표는 페리 선착장 쪽을 가리키며 “4년 뒤 여기에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대학과 연구센터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방정부로부터 섬의 관리를 위임받았을 때, 주거 용도로는 개발하지 못하는 조건이 있었다”며 “거주민이 없어 실험적 연구가 가능한 점을 이용해 세계적인 기후변화 연구 허브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은 월가에서 가깝긴 해도 사실상 버려진 섬이던 거버너스아일랜드를 두고 뉴욕시와 NYCEDC, 거버너스아일랜드재단 등은 10년 넘게 고민했다. 결국 브루클린이나 퀸스 강변은 주거단지로, 이 섬은 미래 산업 연구의 전초기지로 만들기로 결론 내렸다. 킴벌 CEO는 “도시가 계속해서 살아 있으려면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며 “미래의 일자리인 ‘그린 테크’ 분야를 뉴욕에 유치하는 게 가장 전망이 높다는 데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뉴욕시는 세계 주요 대학들에 기후변화연구센터 제안서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전했다. 50여 개 대학이 관심을 보였고 지난해 스토니브룩대와 조지아공대, 듀크대, IBM 등이 참여하는 산학연합 스토니브룩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무려 7억 달러(약 9646억 원) 이상 투자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섬에선 이미 기후변화 관련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연안에서 굴을 키워보는 ‘빌리언 오이스터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현장에서 만난 헬렌 헤트릭 커뮤니케이션담당 국장이 연안 부두에 걸린 밧줄을 끌어올리자 작은 우리 안에 진흙과 굴이 얽혀 있는 게 보였다. 헤트릭 국장은 “뉴욕 굴요리 레스토랑에서 수백만 개의 껍데기를 가져와 굴이 자라도록 키우고 있다”며 “굴은 바다 오염을 정화하는 필터 역할을 하는 데다 자연재해도 막아주며 해양 생태계의 다양성을 복원시키는 역할도 한다”고 설명했다.
뉴욕은 거버너스아일랜드 개발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과거 이스트강의 또 다른 섬 루스벨트아일랜드 개발에 성공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로 미 월가가 초토화되자, 당시 막 부상하고 있던 ‘실리콘밸리’를 뉴욕에도 도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스타트업과 신기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스탠퍼드대처럼, 코넬공대를 루스벨트아일랜드로 유치해 뉴욕 테크 산업의 허브로 키워냈다.
뉴욕시는 ‘기후 익스체인지’로 불릴 거버너스아일랜드의 새 캠퍼스도 22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에 연간 대학생 600명과 직업 훈련생 6000여 명, 교수진 250여 명이 상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