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28일 탄금대 패전, 귀 막은 독선의 결과[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24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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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패한 남한강 절벽 탄금대의 ‘열두대’ 바위. 동아일보DB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패한 남한강 절벽 탄금대의 ‘열두대’ 바위.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경상도를 장악했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명성을 날리던 장군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남쪽으로 급파되었다. 신립은 조령이라는 천혜의 관문을 지키지 않고 적들이 소백산맥을 넘어오기를 기다려 탄금대 앞 벌판에 진을 치고 일전을 겨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약 8000명이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조정 차원에서 일본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닷새 만에 한양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세간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조선이 전쟁에 아예 대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조는 군사 경험이 있는 장수들을 남방에 배치했는데, 이순신도 이때 선조가 신하들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억지로 전라좌수사에 임명했었다. 이외에도 이때 조정에서 배치한 장수들은 임진왜란 기간 자기 몫을 충분히 해냈다. 그렇다면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왜 조선은 초기에 엄청난 패배를 거듭했던가? 그것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대군이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도적 무리가 아니라 정규전을 수없이 치른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하지만 조정은 대군이 넘어와 일시 경상도가 위험에 빠지긴 했어도 북방에서 여러 전투를 치른 용맹한 장수인 신립이 출정하면 해결될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립 역시 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신립은 일본군을 여진족 정도로 생각하는 심각한 오판을 했다. 신립은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적의 전술 능력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신립의 부하들이 조령에서 방어전을 펼칠 것을 권했지만 신립은 이를 무시했다. 급히 끌어온 병사들이라 산중에서 싸우면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이 신립의 생각이었고, 이 때문에 아예 도망칠 곳이 없도록 강을 뒤에 둔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조선군의 전멸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신립에게는 여러 기회가 있었다. 조령이 어려웠다면 좀 더 물러나 군사를 더 모으고 유리한 지형을 찾아 적의 진입을 막을 수도 있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병력을 더 모으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이런 큰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적이 조령을 넘어왔다는 척후의 보고도 있었는데, 신립은 군심을 어지럽힌다고 척후의 목을 베어버렸다.

신립의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불통을 놓고 후대 사람들은 다른 이유를 찾아내려고 했다. 신립에게 버림받아 원한을 품은 여자 귀신이 조령에서 싸우지 말고 탄금대에서 싸우라고 조언을 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전설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정보를 모으고 주변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다. 신립은 그런 일을 게을리 했고 자기 독단에 빠져 부하들과 소통하지 않았다.

바다의 명장 이순신은 신립과 확연히 다른 자세를 가졌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침략을 전해듣고 군사와 병선을 정비했다. 조정의 출정 명령과 원균의 구원 요청이 있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서야 출정했고 그 이후 승승장구했다.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에게 소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소통을 버리면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과거의 승승장구가 미래의 승전을 담보하지 않는다.

#임진왜란#탄금대 패전#독선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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