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장원재]햄버거만 사러 갔다 세트를 들고 나온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26일 23시 48분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어느 날 햄버거를 사러 패스트푸드점에 갔다고 생각해 보자. 메뉴를 보니 원래 3000원이었던 햄버거가 4000원으로 올랐다. 미간을 찌푸리는데 종업원이 “500원만 더 내면 세트로 해서 감자튀김과 음료도 드리겠다”고 제안한다.

상당수는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격 인상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심리를 이용해 세트를 판매하는 전형적 상술이다.

행동심리학에 ‘대조 효과’란 용어가 있다. 일부러 대조군을 만들어 특정한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위 사례에서 햄버거만 구입하려다 햄버거 세트를 들고 나오게 되는 것도 대조 효과 때문이다. 이걸 소비자의 진정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기금 고갈 막으려다 적자 늘리는 안 택해

22일 발표된 국민연금 공론화 조사에서 시민대표단 500명 중 과반(56%)이 ‘소득보장안’을 선택한 것에 비판적인 전문가가 적지 않다. 현행 제도보다 기금 고갈 시기를 6년 늦추지만 중장기적으로 재정을 더 악화시키는 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선택지를 보면 시민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처음부터 자명했다. ‘재정안정안’은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재 소득의 9%에서 3%포인트 올리는 반면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그대로다. 반면 ‘소득보장안’은 내는 돈을 4%포인트 올리는 반면 받는 돈 역시 10%포인트 올려준다.

손해만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30% 이상 오른 가격을 지불하고 같은 햄버거를 사기보다, 조금 더 내도 음료와 감자튀김까지 들고 나오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다 보니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한 연금개혁을 논의하러 갔다가 재정이 더 악화되는 안을 들고 나오게 된 것이다.

공론화 조사를 설계한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원회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합해 수백 가지 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금개혁 취지에 따라 재정을 덜 축내면서 장단점이 엇비슷한 안을 제시했어야 한다.

선택지 달랐으면 결론도 달라졌을 것

행동경제학은 제시하는 선택지에 따라 답변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본다. 국회 연금특위 자문위에서 가장 많이 지지한 안은 내는 돈을 6%포인트 올리고 받는 돈은 현행을 유지하는 안이었다. 이 안을 추가했다면 탈락한 재정안정안이 채택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대조 효과에 따라 추가된 안이 재정안정안을 더 합리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1차 조사 때 “잘 모르겠다”던 부동층이 3차 조사에서 대거 소득보장안을 택한 걸 심사숙고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시민대표단을 구성할 때 ‘소득보장파’가 ‘재정안정파’보다 40% 많았던 걸 감안하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 가까웠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주저하던 시민들도 오류가 있었던 학습용 자료와 “기금 수익률을 높이고 정부 재정을 투입하면 된다”는 소득보장 지지 학자들의 설득에 넘어갔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면 기금 고갈 우려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또 정부 재정 투입이 만능열쇠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이번 공론화 토론이 참고한 건 2006년 영국의 ‘연금의 날’ 전국토론회였다. 하지만 당시는 수급 연령과 의무 가입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시민들이 의견을 냈지, 누가 봐도 유불리가 분명한 두 안을 비교하진 않았다.

시민 토론과 학습, 설문을 거쳐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공론화 조사는 ‘시민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만큼이나 ‘책임을 떠넘긴다’는 단점도 분명하다. 국내에서 10여 차례 시도된 공론화 조사도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건 절반가량이다. 이번 공론화 조사 역시 반면교사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패스트푸드점#가격 인상#기금 고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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