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이 깊은 늪에 빠진 듯하다. 최근 국민연금 공론화 조사에서 시민대표단 500명 중 56%가 ‘더 내고 더 받는’ 소득보장안을 선택했다. 다음 세대도 받을 수 있는 연금 개혁이라는 당초 목표에서는 더욱 멀어진 탓에 개혁안이 아니라 개악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연금 개혁은 결국 내가 받을 몫을 줄이자고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다. 정부와 국회가 앞장서도 어려운 일인데 시민대표단 500명에게 이를 미뤘으니 누구의 책임인가.
연금 개혁, 공론화로 동력 얻기 어려워
2015년 인사혁신처장으로 재임할 당시 ‘더 내고, 오래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여야 대타협을 통해 1년 반 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여야 간 셈법이 다른 건 지금과 같았지만 이해 집단 간에 꼭 지켜야 할 것을 정해 두고 국회 논의를 진행했다. 연금 보전에 투입되는 재정을 줄여 국민 부담을 줄인다는 목표를 공유한 것이다. 정부는 매주 토론회와 설명회를 열어가며 공무원 조직을 설득했다. 절대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에도 공무원연금 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건 정부가 개혁을 주도하며 끈질기게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의 국민연금 개혁을 보자. 2022년 7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정부와 국회가 최종적인 개혁안 제출을 서로 핑퐁하더니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1대 국회 임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야는 시민대표단의 설문 결과를 두고 공방만 벌이고 있다. 정부 역시 “현재보다 재정을 악화시키는 안”이라며 남 얘기 하듯 한다.
공론화 과정의 설계도 문제가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개혁이라는 목표와 상충되는 ‘더 내고 더 받는’ 소득보장안이 선택지로 올라갔을 때부터 연금 개혁의 실패는 예고된 것이다. 더욱이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대표단 500명의 인적 구성부터 제공된 데이터의 부실 문제까지 논란이 계속됐다. 예를 들어, 기금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할 때 필수적인 경제성장률이나 기대수명의 변화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은 시민대표단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선별적인 데이터 제공은 공론화 과정 자체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공론화를 통해 도출된 ‘더 내고 더 받는’ 안은 기금 고갈 시점을 단지 6년, 7년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소득보장안의 경우 2093년까지 누적 적자가 현행 대비 702조 원 늘어난다.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결국 미래 세대에게 더 큰 부담을 전가하는 단기적인 땜질에 지나지 않는다. 기득권 계층의 지갑을 두툼하게 챙겨주는 데 세금 투입하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일각에선 재정 투입이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보험료로 부담하든지, 국가 세금으로 부담하든지 다 같은 국민의 부담이다.
국민의 오늘과 내일이 달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속도와 방향이 모두 옳아야 한다. 현재처럼 공론화위원회를 통한 연금 개혁은 개혁의 목표도 흐릿하고, 현 세대만 유리한 개악안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미래 세대를 위한 제3안 마련해야
21대 국회서 처리가 어렵다면 차제에 폭넓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제3안이 반드시 필요하다. 최소한 한 세대인 20, 30년을 바라보는 연금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추가 납부, 수급 연령 조정, 수급액 조정 등 할 수 있는 방안을 다 해본 후 소득대체율을 결정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 세대의 십시일반 배려와 양보 또한 필수이다. 단 한 번의 개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다음 세대를 위해 현 세대가 양보한다는 연금 개혁의 목표를 달성할 때만이 연금 개혁에 참여한 전문가와 우리 모두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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