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들은 어떻게 ‘쏘리’를 말하나[정미경의 이런영어 저런미국]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일 21시 59분


허리케인 카트리나 현장을 찾아 이재민들에게 사과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 위키피디아
허리케인 카트리나 현장을 찾아 이재민들에게 사과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 위키피디아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I owe her an apology. I shouldn’t have been such a wiseguy.”(그에게 사과하겠다. 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았어야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사과했습니다. 기자로부터 “미국-러시아 관계를 너무 낙관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자 “내가 언제 낙관했나. 당신 직업 잘못 택한 것 같다”라고 쏘아붙인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입니다. ‘owe an apology’는 ‘사과를 빚지다’라는 독특한 영어 표현입니다. ‘I apologize’보다 사과 강도가 높습니다.

임기 초 사과를 소환한 것은 최근 중남미 이민자에게 ‘불법’(illegal)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사과했기 때문입니다. “I regret using that word”(그 단어를 쓴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행동이 빠른 편이 아닌데 사과는 언제나 초고속입니다. 사과의 언어도 ‘apology’ ‘regret’ 등 다양합니다.

바이든 대통령뿐만이 아닙니다. 한국 문화에서 보면 신기할 정도로 미국 지도자들은 사과에 능합니다. 사과의 기회를 놓치면 그 대가가 더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사과 퍼레이드를 살펴봤습니다.

△“I misled people, including even my wife. I deeply regret that.”(나는 아내 힐러리를 포함해 국민을 오도했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빌 클린턴 대통령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I did not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at woman, Miss Lewinsky”(나는 그 여자, 르윈스키 양과 성관계를 맺지 않았다). 명언이기는 한데 거짓말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최악으로 여기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사과했을까요. 대국민 연설에서 ‘regre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the president used the R word’(대통령이 R 단어를 썼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을 때 중대한 의미가 있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격식을 갖춘 “I’m sorry”에 해당합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국가 간에, 공식 문서에서 쓰는 1급 사과입니다.

△“To the extent that the federal government didn’t fully do its job right, I take responsibility.”(연방 정부가 제대로 일하지 못한 범위 내에서 내 책임이다.)

또 다른 ‘R 단어’가 있습니다. ‘responsibility’(책임)입니다. 책임을 인정하는 식으로 사과하는 것입니다. 미국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된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썼던 사과법입니다.

바람직한 사과는 잘못 인정, 참회, 개선 의지 등 3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합니다. ‘responsibility’ 사과는 참회가 빠진 ‘반쪽 사과’라는 비판도 있지만,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리더십이 강조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좋아합니다.

이 사과가 논란이 된 것은 ‘responsibility’가 아닌 ‘to the extent’ 때문이었습니다. ‘정도 내에서’ ‘하는 한’이라고 범위를 규정지었습니다. 듣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조건부 사과입니다. ‘to the extent that’을 빼야 했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I let down the country. I let the American people down.”(나는 나라를 실망시켰다. 미국 국민을 실망시켰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 때 사과하지 않고 사임했습니다. 사과는 3년 뒤에 나왔습니다. 영국 언론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마치 독백하듯이 ‘let down’(실망시키다)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정식 사과는 아니었지만 그가 느끼는 후회와 통탄이 잘 전달됐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닉슨 대통령을 용서한 미국인들이 많습니다.

사과의 지존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입니다. 외국에만 나갔다 하면 고개를 숙이는 통에 ‘사과 순방’(apology tour)이라는 조롱까지 받았습니다. 유럽 방문 때 “America has shown arrogance”(미국은 오만했다), 아랍국 방문 때 “we have not been perfect”(미국은 완벽하지 못했다), 테러와의 전쟁 실패에 대해 “we went off course”(미국은 항로를 이탈했다) 등 다양한 언어로 사과했습니다.

미국에서 자녀가 잘못했을 때 부모가 타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It’s never too late to say sorry”(미안하다는 말에 늦은 때란 없단다). 사과는 결코 나약함이나 패배의 증거가 아니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사과에 인색한 이들이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발송되는 뉴스레터 ‘정미경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에서 더욱 풍부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사과#사과의 기회#바람직한 사과#잘못 인정#참회#개선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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