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여대가 내년도부터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에 신입생을 배정하지 않기로 하면서 두 학과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됐다. 덕성여대 관계자는 “학교가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비인기’ 어문학과 폐지는 15년 전 시작됐다. 동국대가 2009년 독문과를 폐지했고 건국대(2005년)와 동덕여대(2022년)는 독문과와 불문과를 유럽학 전공에 통합했다.
학과 통폐합 이유는 단순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내 대학들은 급격한 성장기를 거치며 어문계열 학과를 대폭 늘렸다. 독일과 프랑스는 대학 학비가 사실상 무료라 유학을 위해 배우는 사람도 상당했다. 유럽에선 독일어가 모국어인 인구가 약 1억 명에 달하고 프랑스어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통용된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공급보다 많지는 않다. 졸업할 정도만 배우고 다른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더 많다.
그렇다면 어문계열 학과들은 이대로 퇴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여전히 어문학과를 중시한다.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 등 연구 중심 명문대들이나 윌리엄스, 애머스트 등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는 어문학과를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대학이 수요가 많지 않은 어문학과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1960년대부터 주립대들을 연구중심대학(UC), 교육중심대학(CSU), 지역사회대학(CCC) 등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대학들이 연구와 실무자 양성, 직업 및 평생교육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다.
실무인력 양성 차원에서도 어문학과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미중 갈등 속에 침체된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인도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7개국(NEW 7)이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베트남은 한국인이 약 20만 명이나 거주하는 3대 교역국이지만 베트남어과를 둔 국내 대학은 한국외대 등 3곳뿐이다. 또 기업들이 광활한 인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힌디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2곳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 진출 확대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는 베트남어와 말레이·인도네시아어(마인어), 힌디어, 아랍어 등의 어문학과는 더 늘릴 필요가 있다.
또 어학이나 문학 중심의 교육보다는 정치, 경제, 역사 등을 아우르는 지역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현지 사업 파트너, 직원 등과의 스킨십을 위해 현지어는 꼭 필요하지만 단순 통번역의 역할은 인공지능(AI) 번역기의 발달로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를 넘어 현지 역사 등을 깊이 이해하고 정치, 경제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실무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독일 베를린자유대나 영국 셰필드대 등 최근 한류 영향으로 전공자가 급증한 한국 관련 학과들은 대부분 한국학과로 개설돼 있다.
학과 정원도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에선 1993년 하노이국립대를 시작으로 한국학과가 개설됐는데 올해 2월 기준으로 46개 대학에 재학생이 2만5000여 명에 달한다. 수요가 많아 졸업생들의 급여 수준도 높다. “다음엔 어떤 학과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한탄보다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는 새로운 변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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