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간 딸을 그리며[이준식의 한시 한 수]〈262〉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2일 22시 24분


황량한 들판 연기, 차가운 비에 더욱 서글퍼지는 이 마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이 다 젖는다.
그 옛날 모래톱 파란 풀이 봄바람에 흔들리던 거 말고는,
네가 강을 건너 시집가던 그때 본 그대로구나.
(荒煙涼雨助人悲, 淚染衣巾不自知. 除卻春風沙際綠, 一如看汝過江時.)

―‘오씨 집안에 시집간 딸에게 시를 보내다(送和甫至龍安微雨因寄吳氏女子)’ 왕안석(王安石·1021∼1086)





엄부자모(嚴父慈母)라 하듯 아버지는 대개 무심한 듯 과묵하고 뚝뚝하시다. 살가운 정과는 거리가 멀다. 옛날이라고 딸 바보, 아들 바보가 왜 없었겠는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던’ 그 손길에 무슨 부와 모의 차별이 있었으랴만 자식 사랑을 내색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겨온 전통을 어쩌겠는가.

그런 관행을 감내하기가 버거웠을 시인, 이곳 나루터에서 벌써 두 번째 이별을 맞는다. 이번에는 동생이 벼슬하러 가는 길이니 화기애애한 환송연이 될 기회. 하지만 막상 현장에 당도해보니 황량한 풍광만 시야에 들 뿐, ‘그 옛날 모래톱 파란 풀이 봄바람에 흔들리던’ 장면과는 딴판이다. 문득 시집가는 딸과의 이별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시제를 간략하게 달았지만 이 시의 원제를 풀면 ‘용안(龍安) 나루터에서 아우 왕안례(王安禮)를 전송하는데 부슬비가 내리기에 그 편에 오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에게 시를 보낸다’라는 의미가 된다. 시제를 본문만큼이나 길게 쓴 의도, 그것은 아마 딸과의 추억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아비의 애틋한 마음을 담아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시집#딸#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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