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수석실 폐지” 尹 당선인 첫 화두
‘슬림한 대통령실-책임장관’도 핵심공약
“민심 청취” 명분 민정수석 부활,
더구나 검찰 출신 수석 내정은 황당
민정수석실 폐지는 2022년 3월 당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인 집무실에 첫 출근을 해서 첫마디로 던진 화두이자 대국민 약속이었다.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꾸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다짐이었다.
윤 대통령 집권 청사진의 ‘첫 페이지’에 해당하는 민정수석실 폐지 공약을 뒤집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 주 중으로 민정수석실 부활을 포함한 대통령실 직제개편안이 발표될 것이라고 한다.
민정수석실을 부활하는 공식 명분은 “민심 청취”다. 지난주 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차담회에서 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정 운영을 하다 보니 민심 정보, 정책이 현장에서 이뤄질 때 어떤 문제점과 개선점이 있을지 정보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에서도 민정수석을 없앴다 2년 후 다시 만들었는데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우선 DJ 정부가 ‘옷 로비 의혹’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고 나서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수 출신 김성재 씨가 첫 6개월을 맡았고, 이후 검찰 출신들이 줄줄이 민정수석 자리를 꿰찼는데 DJ 정권 후반부는 수많은 ‘게이트’와 ‘의혹 사건’의 연속이었다. DJ의 아들들이 직접 비리 사건에 연루돼 사법 처리되는 일까지 있었다. 특히 신광옥 씨는 본인이 해양수산부 공무원으로부터 5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민정수석을 둘러싼 ‘흑역사’는 비단 DJ 정권만의 일이 아니다. 박정규 전 민정수석(노무현 정부)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9400만 원어치 상품권을 받은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박근혜 정부)은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해 사찰을 지시한 혐의로, 조국 전 민정수석(문재인 정부)은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감찰을 무마해 준 혐의로 각각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대법원 확정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민정수석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업무 경계가 불분명하다 보니 빚어지는 일이라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민정수석실 부활은 윤 대통령의 또 다른 주요 대선 공약 중 하나인 ‘슬림한 대통령실’에도 위배된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 중심제라는 헌법정신에 충실하게 정부를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실은 국가적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기능 중심의 슬림한 조직으로 개편하고 각 부처 장관에게 실질적인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는 ‘분권형 책임장관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 공약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가 의대 2000명 증원 갈등, R&D 예산 삭감 파문, 수능 킬러문항 배제 혼선 등이다. 모두 대통령실이 너무 앞에 나서는 바람에 꼬여버린 일들이다.
정국 블랙홀로 떠오른 채 상병 사건도 크게 다를 게 없다. 관련자 진술이 엇갈리는 ‘VIP 격노’는 일단 논외로 치자. 국방부 검찰단이 경찰에서 수사 기록을 되찾아간 날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과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간, 임종득 국가안보실 2차장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사이의 전화 통화 등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겠는가.
이런 식이면 민정수석실을 부활해 봐야 괜한 정치적 시빗거리와 리스크만 양산하게 될 공산이 크다.
민정수석실 부활과 관련해서 더욱 황당한 것은 신임 수석으로 검찰 출신인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이 내정됐다는 대목이다. 상명하복이 체질화된 검찰 출신을 민정수석 자리에 앉혀서 어떤 민심 정보를 듣겠다는 것인가. ‘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사정기관 장악 의도라는 지적이 안 나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민심 청취가 진정한 목적이라면, 윤 대통령의 말마따나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인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윤 대통령이 눈과 귀만 열면 될 일이다. 정부 기관이 못 미덥다면 유권자의 바닥 민심에 늘 촉수를 세우고 있는 여당도 있다. “윤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다”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 같은 주문(呪文)만 “민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윤심이다”라는 상식의 언어로 바로잡아도, 최소한 “윤 대통령이 민심을 모른다”는 말을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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