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테러-기후 등 ‘국제공공재’ 수요 폭증
美 ‘나 홀로 패권국’ 지위 유지 사실상 포기
다자협력 강화 맞춰 韓도 리더 될 전략 짜야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발언이 큰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받고 주기식 거래외교를 경험한 터라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하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은 지구적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패권국으로서 외교 대전략의 넓은 스펙트럼 위에서 움직여 왔다. 고립주의와 전면적 상시 개입의 양극단 위에서 다양한 전략을 취해 왔지만 어지러운 국제정치에 질서를 잡아주는 패권의 역할을 방기한 적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 모범 국가로서 인권과 시장자본주의를 증진하고, 국제법을 준수하고 다자주의에 기초한 질서를 세우려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비전도 제시해 왔다.
그러던 미국이 리더의 역할을 버거워하게 된 것은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패권국이란 국제질서에 필수적인 지구적 공공재를 제공하는 국가이다. 전쟁을 막는 세계적 동맹 체제, 핵무기 확산 방지, 경제위기 해결, 수송로 보호 등 무질서의 문턱에서 패권국의 역할은 막중하다. 문제는 국제공공재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다. 지구화시대 불평등, 테러, 코로나와 같은 보건 문제, 급속도로 발전하는 신기술, 기후 문제 등 위기의 요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고 있다. 중국, 러시아의 도전과 미국의 국력 약화가 리더십을 거부하고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주의가 발흥한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 국가의 힘만으로 국제정치의 질서를 만들어가기 어렵게 된 현실이다. 미국이 가장 강한 패권을 이룩한 시기와 국제공공재의 수요가 치솟는 시기가 겹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의 패권이 견고하다고 생각했다. 큰 착시였다. 미국이 중국을 따돌리고 경제가 회복되어 최강자 자리를 다시 차지해도 이제 나 홀로 패권의 지위는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이 가야 할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 과거와 같은 단독 패권국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 둘째, 집단패권 체제를 만들고 이를 이끌어 가는 것, 셋째, 패권의 역할을 점차 포기하고 보통 강대국이 되는 것. 단독 패권을 회복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미국에 큰 이득을 줄 것이다. 하지만 급증하는 국제공공재 제공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여 엄청난 경제력을 축적하고, 정치 양극화를 해결하여 패권 유지에 필요한 능력과 합의를 갖추게 된다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집단패권 체제는 조 바이든 정부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 왔다. 단독 패권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점을 깨닫고 비전이 같은 국가들끼리 패권연대를 만든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동맹과 전략 파트너를 맺을 뿐 아니라 ‘인도태평양’ ‘디리스킹’ 등의 핵심 전략 개념도 일본과 유럽 등 동맹국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다. 패권연대에 속할 나라들을 선별하고, 이들 간 효율적 협력 틀을 만들면서 미국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전략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미 ‘뒤에서 주도하는(lead from behind)’ 전략이라는 서사를 제시한 바 있다.
트럼프주의가 패권의 역할을 지지하는 미국 내 여론의 숨통을 조이고, 동맹국들의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을 사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미국은 보통 강대국이 될지도 모른다. 동맹 네트워크의 수장, 기축통화 발행국, 국제기구들의 지도자로서 패권의 이익은 구조적으로 엄청나지만 단기적인 이익에 치중할 때 미국은 보통 강대국으로 내려서는 것이다. 미국이 포기한 패권의 역할을 떠맡을 만큼 강대한 후보국이 없는 현실에서 국제사회는 더 이상 패권적 안정과 평화를 누리기 어렵게 될 것이다.
미국의 패권 전략이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면서 한국의 외교 전략도 중대한 기회와 과제를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당분간 자유주의 연대의 틀 속에서 사실상 집단패권 체제를 만들고 주도하는 외교 대전략을 추진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이 추진하는 다양한 소다자협력과 유럽 아시아를 연결하는 전략협력, 신기술과 기후 등 새로운 의제 영역에서 출현하는 규제 레짐 등 빠른 변화를 보고 있다. 지구적 리더십 그룹의 일원이 될 역사적 기회다. 주요 7개국(G7), 오커스(AUKUS·미국 영국 호주 3개국 안보협의체) 가입 등의 논의가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AI와 같은 최첨단 이슈의 회의 개최 등 한국의 위상은 높아져 있다. 집단패권 체제 속 선진국들은 실력과 비전의 경쟁을 벌이고, 미국과 보완적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때로는 미국을 이끌면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중이다. 가치외교, 실리외교의 대립 구도나 반미, 친미 싸움은 국제정세 변화는 물론 한국의 위상에도 맞지 않는 구태이다. 대중 전략, 글로벌 사우스 전략, 신기술 전략, 세계경제 전략 등 한국의 국익이 걸려 있는 영역에서 국익과 지구적 리더십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선제적인 질서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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