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의대에 가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성적. 우리 수능시험과 비슷한 아비투어(Abitur) 점수 순으로 선발한다. 이렇게 뽑는 비율이 전체 정원의 20%다. 가장 비중이 큰 60%는 대학 자율에 맡긴다. 나머지 20%를 뽑는 방식이 독특하다. ‘대기기간 전형’이란 게 있다. 지원자 중 최장 7년 이내에서 오래 기다린 순으로 입학시킨다. 여기서 관건은 의료·보건 관련 경력이다. 응급구조대원이나 중환자실 간호사, 요양병원 간호조무사, 조산사 등 현장 경험이 풍부할수록 가산점이 높아 주로 의료 경력자들이 지원한다. 독일 의대생 5명 중 1명은 이 전형으로 들어온 구급대원 간호사 출신들이다.
독일에서도 의대 입시는 치열하다. 한정된 기회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두고 독일이 고심한 결론이 바로 이 전형이다. 의사가 되는 경로는 다양해야 하고, 성적 우수자가 아니어도 환자를 돌보려는 사명감과 열정이 강하다면 입학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늦깎이 입학생들이 의대 공부를 못 따라갈 것이란 우려도 나왔지만 기우였다. 의사 국가고시에서 다수가 탈락하는데 대기전형 출신들의 합격률은 다른 경로 입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의대 공부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의료 현장에서 자신의 적성을 검증하고 환자에 대한 이해심을 기른 학생들이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게 독일인들의 인식이다.
2년 전 독일에서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였다. 코로나 사태로 의료인력 부족을 실감한 뒤 1만여 명인 입학 정원을 50% 늘리기로 했다. 독일은 인구당 의사 수가 우리보다 2배 이상 많다. 거기서 더 늘린다니 의사들이 반발할 법도 한데 대부분 찬성했다. 의사 업무가 과중해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독일 의사들은 추가 공급될 의사들을 경쟁자가 아닌, 환자를 나눠 맡을 동료로 보는 것이다.
의사는 독일에서도 고소득 직종이다. 근로자 평균 임금 대비 의사 소득이 5.6배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위다. 1위(6.8배)인 한국과 차이가 크지 않다. 독일 의사들이 의대 증원에 있어 한국 의사들과 생각이 다른 것은 의대생 시절 경험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동기들, 특히 환자 곁에서 궂은일을 하며 의료의 굳은살이 박인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수련하는 것 자체가 살아 있는 소양교육이다. 전국의 ‘전교 1등’들이 모여 엘리트로서 집단 자의식을 쌓아가는 한국 의대생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전교 1등’ 의사를 원하지, 실력이 모자란 의사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면 일부 의사들은 이런 반대 논리를 편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의대 입시가 수십 년 지속돼 온 걸 고려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좁은 의대 구멍을 통과해 힘들게 공부하고, 온갖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며 수련했는데 이제 와 문턱을 낮추겠다니 선뜻 동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이번 의대 증원 정책의 한계 중 하나는 성적 위주의 천편일률적 입시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3000명인 정원을 1500명 늘린다고 의사라는 직업을 대하는 의대생들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는다. 증원이 현실화되면 의대 합격선이 2.9점 낮아질 거라고 학원가에서 전망하는데 선배들보다 2.9점 낮은 ‘차상위’ 수재들이 늘어난 정원을 채울 뿐이다. 필수의료를 강화하려면 수가체계 개선이 급선무지만 의대생들이 사회적 책임을 내면화하도록 입시제도도 바꿔야 한다. 의료 일선에서 수년간 환자들과 부대껴 본 경험을 성적 못지않게 높이 평가하는 쪽으로 의대 관문이 넓어진다면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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