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7세 청년 김정은은 아버지인 김정일의 운구차를 뒤따랐다. 긴장한 얼굴로 눈물만 흘리던 김정은에 대해 당시 우리 당국은 “재빠르게 원로들을 휘어잡고 전권을 휘두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10년이 흘러 2021년,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을 ‘위대한 수령’이라 불렀다. ‘수령’은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에게 붙는, 사실상 고유명사다.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을 넘어 김일성 반열까지 올랐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인식됐다. 당시 국가정보원은 “북한에선 ‘김정은주의’를 새로운 독자 사상체계로 정립하는 시도가 있다”고 했다. 선대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김정은의 행적을 종합해 이렇게 판단한 것이다.
다만 이후 김정은의 발언, 행보에서 선대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었다. 특히 후계자 지목 당시부터 김일성의 체형이나 헤어스타일까지 모방한 김정은은 최근까지도 ‘김일성 따라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또 흘러 2024년. 김정은은 조용히, 하지만 과감히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대놓고 김정은을 ‘태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태양은 김일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도 ‘태양의 성지’ 대신 ‘애국, 혁명의 성지’ 등으로 매체들은 바꿔 불렀다. 김정은은 지난달 김일성 생일 땐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도 참배하지 않았다. 최근 만난 정부 고위 당국자는 “김정은이 이제 할아버지보다 내가 앞자리에 있다고 외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2021년 ‘김정은주의’란 표현이 처음 등장했을 땐 김정은이 경제난 타개를 위해 전략적으로 자신을 우상화한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식량난이 가중되자 주민들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김정은이 고육지책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기류는 그때와 좀 다르다.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는 더 대범해졌고, 선대에 대한 신격화는 더 과감하게 차단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김정은의 자신감이다. 정부 당국자도 “최근 거침없는 김정은의 홀로서기 행보는 몇 년 전 모습과 확실히 다르다”고 했다. 이 자신감은 코로나19 봉쇄가 풀리면서 나아진 식량 사정 때문일 수도, 북-러 관계 밀착의 부산물인 푸틴의 화끈한 지원 덕분일 수도 있다.
김정은의 ‘셀프 우상화’는 대남 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태양을 자처하는 김정은은 대남 공세적 카드를 쏟아낼 것이다. 남한을 그래도 ‘동족 관계’로 봤던 선대와 차별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김정은은 이미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사실상 선전포고까지 했다. 이를 명분으로 강도 높은 대남 도발에 나서는 동시에 내부적으론 대한민국을 적대국으로 간주하는 정책·교육 마련에 집중할 것이다. 마침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냉전 기류는 김정은의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북한의 노골적인 대남 노선 변화에 대응하는 건 결국 정부의 과제다. 일단 차분하고 냉정하게 김정은의 새로운 담론부터 분석해야 한다. 이후 대응은 단호하고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북한 체제·정책 변화 흐름의 도입부에서 정면승부 대신 방관할 때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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