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간 미국·유럽연합(EU)·대만·일본에서 발표된 역내 반도체 설비투자 계획이 총 753조 원 규모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런 계획을 현실화하기 위해 각국은 천문학적 규모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내걸고 한국의 대기업을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업체의 투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선진국들이 공통적으로 상정하는 데드라인은 인공지능(AI) 혁명이 본격화돼 반도체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2030년이다.
동아일보와 산업연구원(KIET)이 2021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4개 지역에서 발표된 반도체 설비투자 계획들을 분석한 결과 이 중 약 60%를 유치한 미국이 압도적 선두였다.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법이 확실한 효과를 거둔 셈이다. 유럽, 일본, 대만은 각각 11∼16% 정도다.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자국 내에 반도체 생산설비를 확보하기 위한 ‘쩐의 전쟁’이 진행 중이다.
설비투자 대부분은 2030년 이전에 마무리된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인텔, 대만 TSMC 반도체 공장은 내년 상반기부터 가동된다. 독일 차량반도체 기업 인피니언의 드레스덴 공장은 2026년 가동 예정이다. 일본 대기업들이 세운 라피더스는 2027년부터 홋카이도 공장에서 2나노미터급 첨단반도체를 만드는 게 목표다. 미국 원천기술과 설계, 일본의 소재를 활용해 한국, 대만이 최종 제품을 만들던 글로벌 반도체 분업체제가 몇 년 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다.
상황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데 한국은 반도체 투자의 단계별 시간표조차 불확실한 상태다. 정부가 23년 뒤인 2047년까지 622조 원을 투입해 용인반도체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출발 단계부터 삐걱대고 있다. SK하이닉스 공장 건설은 주민 이주, 용수 문제로 벽에 부딪쳐 3년 늦어진 내년에나 시작된다. 더욱이 투자의 30% 이상을 해외 기업으로 채운 미국, 일본과 달리 한국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에 대부분을 의존한다.
국가역량을 반도체 투자에 총동원하는 선진국에 맞서려면 우리 정부와 기업도 속도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올해 일몰을 맞는 K칩스법 연장을 비롯해 온갖 걸림돌을 치워 주는 건 정치권 몫이다. 누구 하나 제 역할을 못 하면 6년 뒤 새롭게 그려질 반도체 세계지도에서 한국의 위상은 심하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