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발길[이준식의 한시 한 수]〈263〉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9일 2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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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너무 늦게 찾아온 게 한스럽구나. 그 옛날 아직 피지 않았을 때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바람이 흔들어 꽃잎이 낭자하게 흩어졌고, 푸른 잎은 녹음이 되고 가지엔 열매가 가득하구나.

(自恨尋芳到已遲, 往年曾見未開時. 如今風擺花狼藉, 綠葉成蔭子滿枝.)

―‘꽃을 한탄하다(탄화·歎花)’ 두목(杜牧·803∼852)





발걸음이 늦어지다 보니 꽃잎은 이미 땅 위에 낭자하게 널브러져 있다. 옛날 꽃 피기 전에 보았던 꽃나무, 그새 꽃자리엔 녹음이 무성하고 열매까지 주렁주렁하다.

상춘(賞春) 기회를 놓친 걸 탄식하는 노래는 흔한 소재. 게다가 발상도 그리 도드라지지 않으니 명인의 경물시치고는 좀 밋밋해 보인다. 한데 실화인지 아니면 호사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염문(艶聞)인지 이 시와 관련된 스토리가 당송(唐宋) 소설류에 수차례 등장한다.

젊은 시절 두목은 호주(湖州)를 유람하다 여남은 살 아리따운 소녀를 만난다. 이때 그가 소녀의 모친에게 당부한 말, 10년 안에 딸과 혼인하겠으니 기다려 달라. 언약이 이루어지자 그는 예물까지 건네주고 장안으로 온다.

후일 그곳 자사(刺史)가 되어 돌아온 때는 14년이나 지나서였다. 소녀는 이미 3년 전 혼인하여 자식까지 둔 처지, 시인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제 꽃잎은 발아래 낭자하고 가지엔 열매가 가득하구나.’

같은 시제로 표현을 약간 달리한 시도 전해진다. ‘봄 찾아 나선 내가 한발 늦었는 걸, 슬퍼하며 꽃을 원망할 수야 없지./광풍에 짙붉은 꽃 죄다 스러지고, 푸른 잎은 녹음이 되고 가지엔 열매가 가득하구나.’ 자책이자 동시에 여인을 향한 축복 같기도 하다.
#꽃#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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