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후암동 해방촌은 황인숙 시인의 ‘나와바리(縄張り·영역)’다. 황 시인의 둘도 없는 ‘남사친’인 소설가 고종석 선생의 어림짐작으로는 여기 산 지 못해도 30년은 넘은 것 같단다. 시인이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요인도 물론 있겠지만 내 생각엔 고양이 때문이다. 석양이 살짝 서향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후암동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길고양이 밥을 주는 게 시인의 중요한 일과니까. 누가 시킨 일도 아닌 것을 사역처럼 수십 년째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오고 있다. 저녁을 고양이에게 할애해야 하는 황인숙 시인에겐 도락이 하나 있는데, 가끔 친구들을 동네로 불러 점심을 함께 먹는 것이다.
이날 점심에는 나도 초대를 받았는데 후암동 종점에 있는 ‘준참치’라는 곳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예의 고종석 선생과 번역가 심혜경 선생이 멤버였다. 채 열 평이 안 되는 홀에 식객이 빼곡하고 문밖엔 고스란히 햇볕을 받으며 웨이팅 중인 손님까지 있는 걸 보니 제법 소문난 집임이 틀림없다. 황인숙 시인이 일행에게 권한 메뉴는 참치정식 1만3000원짜리. 먼저 참치샐러드가 나오고, 그다음엔 정갈한 참치회 스무 점 정도가 나온다. 그리고 참치초밥도 사람당 두 점씩 나오고. 선도가 훌륭한지 맛이 아주 좋다. 회와 초밥을 즐길 즈음이면 참치무조림과 함께 매운탕과 밥이 나온다.
주인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체구 좋은 남자분인데 젊어서 일식집에서 일을 배우고는 15년 전 이곳에 자기 식당을 차렸단다. 처음 후암동 종점에 식당을 내기로 하고 간판을 올렸을 때, 이분의 마음은 얼마나 부산하면서도 설렜을까. 그나저나 몰래 치를 심산이었던지 황인숙 시인이 무심한 척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인에게 5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는 것이다. 그걸 우리 일행은 고갤 돌려 모두 보고 말았다. 황 시인이 잠깐 자릴 비운 사이 내가 일어나서 주인장에게 황 시인에게 받은 돈을 돌려 달라고 하곤 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분이 하는 말이, 그러면 시인님한테 혼난다고, 절대 돈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호라, 이 집 주인은 단골의 직업과 성정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렷다. 밥값 실랑이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 노포의 아름다운 풍습을 발견한다. 노포 주인과 동네 사는 단골 사이에 만들어진 이심전심의 전통은 얼마나 유서 깊은 것인가.
종점은 차로는 더 갈 데가 없는 곳까지 가서 사람들이 내리는 곳이다. 거기서부터는 터벅터벅 걸어서 몸을 누일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 길 위에 하루 치의 피로를 끌고 가는 사람도 있고 막 피어오른 사랑 때문에 온몸이 붉어진 채 연인을 배웅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부드러운 식감의 회 한 점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피로와 사랑의 의미를 섬세하게 복기하기엔 준참치만 한 곳도 없어 보인다.
식사를 다 마친 황인숙 시인이 일행에게 인근 용산고 담장에 핀 인동초 향이 아주 그만이라면서 맡으러 가잔다. 이 구역을 오랫동안 관리해온 소공녀 같은 시인의 말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세 사람이 군말 없이 시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하는데, 나는 인동초 앞에 당도하기 전 이미 어떤 푸르고 진한 향기를 깊이 음미한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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