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랑스 파리에선 중국 국책 연구원인 중국사회과학원이 처음으로 학회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프랑스와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국빈 방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양국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참석자들은 중국이 파리 중심에서 이런 행사를 열어 놀랍다고들 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의 ‘과잉생산’을 문제 삼으며 수입 장벽을 높이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민간 외교관’ 된 佛의 中학자들
냉랭한 양국 관계에 훈풍을 불어넣는 학회는 두 나라의 어문학자들이 마련했다. 중국사회과학원과 함께 학회를 준비한 프랑스의 국립동양언어문화대엔 중국 전문가들이 많았다. 머리 희끗한 원로 학자들부터 30, 40대 젊은 박사과정 학생까지 다양한 세대가 각각 단상에 올랐다. 1970, 80년대에 베이징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는 한 여성 학자는 발표에서 중국의 격변기를 지켜본 소회와 애정을 드러냈다. 또 다른 프랑스인 중국학자는 “우린 협력에 열려 있다”며 강한 교류 의지를 드러냈다. 프랑스와 중국 간에 분쟁이 불거지면 언론과 정부에 건설적인 조언을 하는 이들이다.
이 현장을 지켜보며 최근 한국에서 불어불문과를 비롯한 외국어문학 학과가 사라진다는 소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들 학과에서 양성되는 학자들이 한국과 유럽의 거리를 좁혀주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덕성여대는 내년도부터 이례적으로 불어불문학과와 독어독문학과를 동시에 없애기로 했다. 이런 현상은 거침없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 2009년 동국대가 독어독문학과 문을 닫았다. 2005년엔 건국대가 독어독문·불어불문학과를 ‘EU(유럽연합)문화정보학과’로 통합했다.
일부 대학에서 이런 현상이 번진다고 이 분야 학자가 배출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깊이 있게 공부할 곳이 줄어드니 다른 인기 학문에 비해 희소해지거나 소멸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다양한 학문, 복잡한 이슈 풀어
이런 학자들은 단순히 어문학만 연구하는 게 아니다. 독일이나 프랑스를 구석구석 꿰고 있는 지역 전문가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가 독일이나 프랑스와 분쟁에 휘말렸을 때 상대국의 관점에서 좋은 해법을 찾는다. 이 지역에 진출하는 기업들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도와 시장 개척의 첨병이 된다.
게다가 무역 분쟁이나 공급망 위기 등 굵직한 세계 현안들은 과거보다 여러 지역의 문제가 얽혀 복잡해지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다양한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더 필요해졌다. 우리와 먼 듯한 지역의 연구에서 창의적인 대안이 도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학계는 이런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최근 취재 중 만난 국내 한 사립대 총장은 대학들이 교수 임용이나 학문 연구에서 영미권에 지나치게 의존해 다양성이 부족해졌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비인기학과를 구조조정하는 대학들도 고충이 클 것이다. 학령인구가 줄어 대학 재정이 쪼그라드는데 이런 학과는 수요가 거의 없어 돈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학은 수요에 맞게 인재를 공급하면서도, 말라가는 수요를 창출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물론 이런 대학들이 학문의 다양성을 지킬 수 있도록 정부도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공교롭게 유럽은 한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늘리려 하고 있다. 한류의 부상으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는 데다, 중국과의 통상 마찰로 중국의 대체 판로가 될 한국의 전문가를 키우고 싶어 한다. 지금이야말로 유럽과의 교류 여건이 무르익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학계가 더 넓은 관점과 긴 호흡으로 유럽에 바짝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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