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린다. 공민왕 9년(1360년)에 스물네 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해 정계에 등장했다. 공민왕 13년에 이성계의 여진족 정벌에 따라갔다. 이후 이성계와 동지가 됐다.
성리학에 해박하여 남들을 압도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의 해석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뒤에 성리학 책이 중국에서 들어온 뒤 정몽주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을 보고 승복했다.
정몽주는 몸을 사리지 않는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사신으로 명나라로 떠났다가 배가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몽주는 바위섬에서 마구를 베어 먹으며 열사흘을 버틴 끝에 구조되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다시 바다로 나가기가 꺼려질 만도 한데, 그는 일본에 가는 것도 서슴대지 않았다. 정몽주를 핍박하던 권신들이 일부러 그를 사신으로 뽑은 것이다. 당시 왜구가 극성해서 많은 백성이 잡혀간 상태였다. 정몽주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과 함께 돌아왔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실질적으로 고려의 권력을 차지했을 때까지만 해도 정몽주는 이성계 편이었다.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을 바라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왕을 폐위시키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충신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충신이 섬기는 왕을 쫓아내겠는가?
그러나 이성계가 한걸음 더 나아가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자 정몽주는 등을 돌렸다. 이로써 그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됐다. 새로 왕좌에 앉은 공양왕은 정몽주의 편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 조준 등을 실각시키고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태종)이 결국 정몽주를 살해하고 만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했다고 전해온다. 선죽교에는 정몽주가 흘린 피가 돌에 스며들어 있다고도 한다. 돌에 피가 스며들어 수백 년을 내려온다는 게 가능할까? 조선 초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죽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가 집 근처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성종 때 남효온(1454∼1492)은 개성에 갔을 때 정몽주가 집 근처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됐다는 이야기는 오늘날로 보면 ‘가짜 뉴스’에 속한다. 정몽주라는 충신을 기리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증거가 필요했고, 그에 적합한 선죽교가 선택됐던 것이다. 대나무가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이고, 다리에서 자객이 기다린다는 것은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선죽교 전설이 생겨나서 재밌다고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게 무슨 중요한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해서 엉터리 정보가 사실인 것처럼 돌아다니면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쉽게 음모론에 빠지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정몽주는 선죽교 이야기를 통해 신격화돼버리고, 이는 정몽주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정몽주는 그저 맹목적인 충신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복잡한 이면을 선죽교 전설은 묻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가짜 뉴스는 언제나 재미 속에 진실을 묻어버린다. 재미있다고 모든 것이 용납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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