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가 있다. ‘공시 대상 기업집단’ 지정 결과가 나오는데 보통 ‘대기업 집단’이라 부른다. 이 순위가 흔히 말하는 공식 재계 서열이다. 자산 5조 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은 올해 88개로 지난해보다 6개 늘었다. 새로 ‘대기업’으로 인정받은 기업들에게 자부심은 잠깐일 뿐이다. 공정거래법과 이 법을 원용하는 다른 41개 법률에 따라 274개의 규제를 새로 적용받는다. 대기업이 안 되려고 성장을 기피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기업 규제를 받는 기업집단은 매년 5, 6개씩 늘고 있다. 경제 규모는 커지고 있는데 자산 5조 원이라는 허들은 2009년부터 15년 동안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48개였던 대기업집단은 3, 4년 뒤엔 100개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30대 그룹 정도의 재벌에 대한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완화한다는 취지였는데, 이제는 중견기업 수준까지도 규제 대상이 됐다.
▷기업 지배구조와 경영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그룹을 지배하는 1인을 특정하도록 하는 ‘동일인(총수) 지정제’도 현실과 동떨어진다. 공정거래법은 ‘기업집단이란 동일인이 사실상 그 사업 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을 말한다’고 규정한다. 개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4촌 이내 친족과 3촌 이내 인척 등의 사업 현황과 주식 보유 현황 등을 신고해야 한다. 평소에 연락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친인척의 자료까지 뒤져야 하는데 자료 제출 의무가 있는 동일인 관련자가 5000여 명, 총수 1명당 60여 명에 이른다. 혹시 자료를 빠뜨리거나 오기를 해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국내 기업만 규제를 받는 역차별 논란도 크다. 쿠팡의 최대주주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은 올해로 4년째 총수 지정을 피했다. 공정위는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2021년부터 김 의장 대신 쿠팡 법인을 동일인으로 정해 왔다. 쿠팡은 한국 법인인 ㈜쿠팡 지분 100%를 미국 모회사(쿠팡Inc)가 소유하고 있고, 쿠팡Inc 의결권의 76.7%를 김 의장이 갖고 있다.
▷공정위가 올해부터 외국인도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김범석)이 최상단회사(쿠팡Inc)를 제외한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지 않고, 총수 일가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예외규정을 충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의장이 사실상 지배력을 갖고 있는데도 국내 기업과 다른 기준을 적용받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다. 애초에 국내 경제력 집중을 막으려고 37년 전에 도입한 ‘국내용’ 규제를 국경이 무의미해진 현재에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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