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된 아버지[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49〉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7일 23시 06분


(전략)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박연준(1980∼)






세상의 모든 딸은 다음의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딸,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사랑하는 딸. 그중에서도 이 시인은 어떤 딸이었을까 궁금하다가 결국 나는 어떤 딸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를 다 읽으면 저 아버지의 얼굴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연로한 아버지는 병원에 실려 가셨다. 육체와 정신이 같이 무너진 상태가 되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신다. 병들고 아픈 아버지를 보면서 자식은 여러 감정에 휩싸인다. 아버지는 지금 어둠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눈을 감으렴” 부탁했다고 표현했다. 나는 이것이 거짓이면서도 참이라는 사실에서 이 시적인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아버지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랑이 없다면 또 무엇으로 살까.

#뱀이 된 아버지#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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