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검사도 사기를 당한다. 얼마 전 퇴임한 검찰 간부는 10여 년 전 서울의 한 검찰청 부장검사일 때 지인에게 속아 690만 원을 떼였다. 사기꾼들을 숱하게 감옥에 보냈던 그마저 사기를 피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기범 앞에선 학력이나 사회 경험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심하고 경계해도 한순간에 당할 수 있는 게 사기 범죄다.
▷전세사기 대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박상우 장관이 최근 기자들과 차담회를 했다. 보증금 8400만 원을 날린 대구의 3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해 8번째 ‘전세사기 사망자’가 나온 지 10여 일쯤 되던 날이었다. 박 장관은 피해자 지원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전에는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꼼꼼하게 따지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날 간담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토부가 원래 피해자 주거지원대책을 발표하려다 돌연 취소하고 차담회로 대체한 것이어서 장관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을지 기대하던 참이었다. 박 장관은 이날 50분간 많은 얘기를 했지만 ‘덜렁덜렁 계약했다’는 한마디가 피해자들 가슴에 비수로 박혔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는 “이전 전세계약 과정에 허점이 상당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피해자들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요즘 전세사기는 세입자가 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처음부터 짜고 치밀한 각본에 따라 세입자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계약을 하고 보니 가짜 주인이거나, 동일 매물 다중 계약, 계약 직후 임대인 변경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이러니 누구보다 악착같이 미래를 준비해 온 젊은이들도 속절없이 당했다. 한 간호사는 휴일 없이 맞교대 근무를 하며 7년간 모은 결혼자금 수천만 원을 잃었고, 조종사를 꿈꾸며 월급을 모아 온 30대 청년은 훈련비로 쓸 5800만 원을 전세보증금으로 날린 뒤 빚을 갚기 위해 비행기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고 한다.
▷전세사기는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제도의 실패가 낳은 지능 범죄다. 주무 장관이라면 누구보다 철저히 이런 관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박 장관은 그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피해자들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고 했지만 이후 질의응답에서 나온 ‘덜렁덜렁’ 발언은 경솔했다. 올 1월 부산지법의 한 부장판사가 전세사기 사건 주범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한 뒤 방청석의 피해자들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절대로 여러분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란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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