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를 넘어 다름 인정하기[내가 만난 명문장/배금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9일 23시 15분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사방에 있다.”

―오르한 파무크의 ‘내 이름은 빨강’ 중


배금주 한국보건복지인재원장
배금주 한국보건복지인재원장
이 책에는 많은 화자가 등장한다. 죽은 자와 개도 말하고 색깔 ‘빨강’도 화자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본 것을 서술하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주된 화자는 술탄의 화방에서 일하는 화가들이다. 모두가 갈등하고, 살인하고, 괴로워한다. 빨강만이 행복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베네치아 화가들이 마침내 신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시각으로 그리기 시작했을 때 오스만 제국 화가들도 열광한다. 그러나 환호도 잠시. 술탄 주인공 만들기가 은밀히 진행된다. 술탄은 원근법이 도입된 화폭 속에서 주인공으로 군림하려 한다. 화가들은 이에 동조하는 ‘젊은 원근법파’와 신의 관점을 유지하고자 하는 ‘나이 든 전통주의자’로 나뉘어 세력을 다투고 결국 살인으로 치닫는다.

신이 사라진 자리가 절대 권력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는 창작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젊은 화가들의 고민은 오늘날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주변을 둘러보자. 각자의 위치에서 보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타자를 경쟁자, 더 나아가 적으로 인식하는 진영 논리가 팽배하다. 나의 위치에서 보는 것은 하나의 사실일 뿐,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는 다름을 인정하고 조합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두 각자의 시야를 갖되, 너와 나의 어설픈 공존을 넘어서자. 삶은 얼마나 뜨겁고 아름다운가? 너의 위치에서 주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나와 너를 넘어서 지구의 목소리,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보자. 뜨겁게 토론하고 함께 고민해서 사방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움을 보자. 내 이름은 빨강이고 싶다.
#오르한 파무크#내 이름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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